군가도 군복도 넘치니 ‘부대’라는 용어를 쓴다. 지난 5월23일 시작된 박근혜 재판이 ‘태극기 부대’를 다시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주로 시위와 재판 참여를 이어오다가 8월부터 거리로 나와 ‘박근혜 무죄석방 1000만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서명운동과 함께 10월22일로 20차에 이른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는 세력은 ‘대한애국당’이다. 최근 구속 연장과 변호인단 사퇴에 맞춘 박근혜의 옥중 정치투쟁 선언과 조원진의 단식 투쟁(10월23일, 14일 만에 중단)이 현재 태극기 부대의 구심점이다. 군사정권이었던 전두환·노태우의 구속과 재판 때는 없었던 극우의 저항이다.

이 극우의 저항은 탄핵 전과 비교해 모이는 수가 많이 줄었다. 줄어든 숫자보다 참여자들 안에 의견의 다양함이 사라진 게 탄핵 전 태극기 부대와 뚜렷한 차이다. 탄핵 전 태극기 집회에서는 “잘못은 했지만 국민이 나서서 탄핵으로 끌어내릴 일은 아니다” “탄핵이 결정되면 목숨 걸고 싸우겠다”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나든 받아들이겠다” “계엄령을 선포하라” 등 다양한 생각과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견해나 역대 대통령 선거 투표 성향도 다양했고 각기 맥락이 있었다. 탄핵 이후 그 다양함이 사라지고 이제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무죄이며, 끝까지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사람들 중 일부가 극단적인 아우성을 내며 광장에 다시 모이고 있다.

참여자들이 들고, 달고, 입고, 두르고 나온 ‘태극기’의 기세도 한층 맹렬해졌다. 이들을 관찰하기 위해 작은 태극기 하나 정도는 흔들어줄 작정을 했던 나도 주춤하게 만들었다. 개인 깃발과 대형 깃발은 물론 머리띠와 머플러, 모자, 양산, 옷, 가방, 휴대전화 등에 태극기가 보였다. 태극기 천지였다. 강심장인 나조차 현기증을 넘어 탈아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태극기 집회 내내 정신 줄을 꽉 틀어쥐어야 할 정도였다.

ⓒ시사IN 신선영10월12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태극기 부대가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탄핵 전 집회에 비해 평균연령은 젊어지고, 여성 참여자의 비율도 늘었다. 그들의 극단성과 절박감은 연설과 구호를 비롯해 깃발과 퍼포먼스의 내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살인적 정치 보복과 인신 감금” “좌파 독재정권이자 김정은의 하수인 정권” 등 문재인 정부에 대한 극단적인 비난이 난무했다. 또 온갖 한복 차림의 박근혜, 경례하는 박근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있는 박근혜 등으로 만든 사진 깃발이 태극기와 더불어 출렁였다. 그들에게 박근혜는 왕조 시대 임금처럼 충효의 대상으로 비쳤다. “민족의 명절 추석을 차갑고 더러운 옥중에서 홀로 보내시는 우리 박근혜 대통령님” “박근혜 대통령님께서 말씀으로 행동으로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목숨 건 투쟁으로 대통령님을 구출하여, 8·15 광복을 잇는 독립투쟁과 해방투쟁으로 나아가자”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세우신 자유민주주의 법치의 명령을 받들어 말없이 투쟁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각하” 등등.

봉건왕조 시대로까지 퇴행해버린 노인들

또 다른 충성과 믿음의 대상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양면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그려진 깃발 사이로 “한·미 동맹 강화하라”는 구호가 매번 들린다. “동성애 개헌 수작을 멈춰라” “지금 대한민국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식구들인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따위 종교와 뒤섞인 구호도 빠지지 않는다.

참수 퍼포먼스의 사진 면면을 보면 그들의 적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지 알 수 있다. 김정은과 문재인에 이어 손석희는 물론이고 유승민·김무성·이혜훈·나경원 등의 머리가 욕설과 함께 매달려 있다. 최근 집회에서 가장 ‘찢어죽일 놈’은, 단연 박근혜의 자유한국당 탈당을 주도하고 있는 ‘배신자 홍준표’다. 그들을 다 밀어내고 난 오른쪽 맨 끝에 현재의 태극기 부대가 있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를 의미한다. 오로지 박근혜와 박정희에게 충성하며 이승만을 넘어 봉건왕조 시대로까지 퇴행하는 그들은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고 있다.

탄핵 전 태극기 노인들에게서 나는, 지배세력에 의해 기억과 해석이 왜곡·조작된 애국 노인들의 생애사적·문화적 인정투쟁의 모습을 보았다. 대부분 태극기 노인들은 호불호를 떠나 법치(탄핵)와 선거 결과(문재인 당선)를 수용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지금 남아 있는 태극기 부대는 법치도 선거도 무시하는 퇴행적인 극우다. 퇴행이야 시간의 문제지만, 극우는 미래의 문제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극우는 보수 정당과 그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현 정부와도 뿌리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으며(우리 사회 정치·경제·문화의 기득권은 모두 보수와 혈맥으로든 자원으로든 연결을 피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언제라도 다시 사회를 위협하는 요소로 세력화될 수 있다. 분단 사회에서 진보 정치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첫 번째 세력이 늘 극우이다. 그들은 태극기 부대를 자양분으로 삼아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장차 보수 정치권의 지형 변화 속에서 태극기 집단이 누구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극우 정치집단으로 살아남아 세를 확장할 여지는 충분하다. ‘촛불’의 존재와 물적 토대 역시 ‘태극기’와 선긋기는 불가능하다. 태극기는 촛불의 그림자다. 피할 길은 없다. 끊임없이 찾아 비추어야 한다.

기자명 최현숙 (〈할배의 탄생〉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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