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영화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성범죄를 저질러온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귀네스 팰트로, 앤젤리나 졸리, 에바 그린, 레아 세이두, 카라 델레바인과 같이 고발자들의 이름이 화려하다는 점에서 한층 주목받았다. 이들의 화려한 이름은 단순히 흥밋거리로 다루어질 일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개인이 아무리 높은 위치까지 올랐다고 하더라도 명성과 재력, 영향력을 비롯한 그 모든 것이 ‘여성’이라는 성별 앞에서 무력했다는 사실이다.

고발이 시작되고 반응은 다양했다. 젠더 폭력을 겪었던 배우들은 앞선 고발에 용기를 얻어 자신의 경험을 공개함으로써 또 다른 이들에게 입을 열 용기를 주었다. 자신이 해당 인물에게 직접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더라도 비슷한 경험이 있거나 영화업계에서 느껴왔던 바를 지지하기 위해 글을 쓴 배우도 있었다. 모두가 용기를 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남성들은 의견을 묻는 질문에 모호한 대답을 내놓아 비난을 사기도 했다. 무응답으로 일관한 ‘남배우’는 심지어 SNS 계정을 폭파해버렸다. ‘남감독’인 우디 앨런은 하비 와인스타인이 마녀사냥을 당할 것이 걱정된다는 말을 남겼다.

의견을 묻는 질문에 남성들은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영화업계 종사자만큼이나 고발을 지켜보는 이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오랜 시간 공공연하게 방치해야 했던 폭력에 대해 입을 여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고, 영화계 내에서 비슷한 소행을 저질렀던 사람들을 고발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편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 배우들이 과거에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감사를 표하는 순간이나 그와 친밀해 보이게 찍었던 사진을 들고 와서 발언의 진의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켈 그림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강력한 기시감이 든다. 올가을의 할리우드가 지난해 가을의 한국 사회와 놀랍도록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년 가을에 이미 ‘#○○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각종 직업군 내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운동을 진행했다.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몰랐고, 언제나 있고도 비로소 있게 된 폭력을 둘러싸고 피어났던 용기·비겁함·가능성· 절망·아름다움·추함 모두를 이번 일로 전부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 뒤 1년을 생각했다. 폭로하는 목소리, 그것을 뒷받침하는 목소리가 다양한 연대기구와 실질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1년 동안 우리는 알렸고, 모금했고, 소송했고, 싸웠고, 흩어졌고, 이겼고, 졌으며 어떤 것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할리우드에서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하비 와인스타인을 회원에서 제명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인 〈SNL〉에서는 이 사건을 풍자하면서 결코 한 명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또 다른 가해자들이 지목되고 피해가 고발되고 있다. 이곳에서처럼 그곳에서도 성폭력에 대응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그들은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까.

레아 세이두는 자신이 오랜 시간 영화계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성폭력에 대해 발표한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오직 진실과 정의만이 우리를 나아가게 하리라.” 분노가 담겨 있을지언정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만들어나가기로 결심한다. 지난해 가을과 올가을, 단 한 번도 감추어진 적 없던 폭력을 새롭게 드러낸 이들의 용기를 지지한다. 그리고 우리가 같은 자리에 머무는 대신 나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기자명 이민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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