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말 〈시사IN〉 편집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왕래가 거의 없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솟았다. 그저 안부 전화일 거라 여겼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몇몇 원 〈시사저널〉 출신 선배들이 의기투합해 〈시사IN〉 창간 10주년 기념호를 만들기로 했으니 합류해달라는 거였다. 내 첫 반응은 “선배들? 미친 거 아냐”였다.

그 말은 신기하게도 지구 반대편처럼 멀어졌던 원 〈시사저널〉 시절을 광속으로 소환해왔다. 눈물을 뿌리며 〈시사저널〉을 접고 〈시사IN〉을 창간하기까지의 기억, 창간 후 1년을 함께했지만 심신이 망가져서 멀리했던 그 이름 〈시사IN〉. 10년을 버텨오다니, 후배들이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그렇게 ‘미친 짓’은 시작되었다. 한 달여 기획안을 둘러싸고 난장을 벌였지만, 난 사실 일찌감치 취재 아이템을 정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취재원’ 코너에 장하성 정책실장을 모시고 싶었다. 한창 현역으로 뛰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 손꼽히는 뉴스메이커였던 그는 5월21일부터 청와대 초대 정책실장, 대통령의 특급 정책 브레인으로 변신해 있었다. 그를 택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기는 하다. 지난 8월 재산 공개 때 알려졌지만, 그는 〈시사IN〉 주주이다. 가파르고 아득했던 〈시사IN〉 법인 설립과 창간 과정에서 그야말로 물심양면의 성원을 아끼지 않은 취재원이었다.

10년 가까이 녹슨 칼을 벼릴 틈도 없이 9월이 되자 움직여야 했다. 먼저 연락처 확인. 휴대전화에 저장된 장하성 실장의 연락처는 ‘017’로 시작되는 번호, 낭패였다. 알 만한 사람을 수소문했다. 반나절 후 새 번호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연결 실패,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하루 반을 기다리다 다시 메시지를 띄웠다. 그로부터 12시간 후인 9월10일 일요일 아침, 잠이 확 깼다. 장하성 실장의 전화였다. 짧게 서로 안부를 묻고 답했다.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 10주년의 의미를 설명하고 인터뷰를 곡진하게 청했다.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거절. 이유는 “‘개별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깰 수 없다”였다. 그 이유를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터뷰 실패를 알리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일주일여 후 이번에는 ‘인터뷰 실패기’를 써달라는 요청이 왔다. 시쳇말로 대략 난감이었지만, 내친김에 해보자 했다.

기자 장영희에게 그는 고려대 교수보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이라는 타이틀로 활동한 현실 참여 지식인이자 대표적 재벌개혁론자로 각인되어 있다. ‘경제민주화’는 2012년 대선부터 단골 이슈로 등장했지만, 그는 1996년 당시만 해도 헌법(제119조 2항)에서나 찾을 수 있는 개념을 시민운동 영역으로 끌어냈다. ‘소액주주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기업 주주총회장에 언론을 대거 불러낸 이도 그가 처음 아닐까 싶다. 당시 기업 주총은 박수를 통과의례 삼아 일사천리로 끝냈는데, 그가 내부 부당거래와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했던 삼성전자 주주총회장은 사뭇 달랐다. 1998년에 장장 13시간30분을, 1999년에는 그가 아예 직접 나서 8시간30분간 경영진과 마라톤 설전을 벌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2006년에는 ‘장하성 펀드’라 불리는 ‘라자드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를 내놓고 재벌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과 가치투자를 역설하며 ‘자본주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던 시민운동가였다.

ⓒ연합뉴스1999년 3월20일 삼성전자 주총에서 경영진을 비판하는 장하성 당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

이런 활동을 두고 ‘과격한 좌파운동가’ 혹은 ‘영미식 신자유주의자’라는 상반된 평이 나왔다. 보는 이에 따라 그는 좌파 혹은 우파가 되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그에게 느낀 것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과 헌신일 뿐 이념은 없었다. 차가운 논리로 무장한 경제·경영학자였지만 사람에게는 따뜻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인터뷰가 성사되었다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왜 그토록 ‘소득주도 성장’에 몰두하느냐고. 그 해답은 두 권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경제민주화를 넘어 정의로운 경제로〉(2014)에서 그는 시장의 불공정한 경쟁구조와 재벌의 경제력 집중, 비정규직과 자영업 노동자 비중이 매우 높은 고용구조, 지나치게 큰 대·중소기업 임금 격차 등이 한국 경제의 위기를 낳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1년 만에 내놓은 〈왜 분노해야 하는가〉(2015)에서 그는 불평등의 주원인이 ‘소득’ 불평등이고 이것은 임금과 고용의 불평등에서 야기되었음을 밝혔다. 그가 제시하는 불평등 해법은 흔히 말하는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 즉 ‘재분배’ 정책이 아니다. 임금분배 구조와 고용구조, 기업구조를 개혁하는 대·중소기업 간, 자본·노동 간의 원천적 ‘분배’ 정책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처방이다.

소득 불평등 같은 사회 양극화의 심화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다는 데 이론을 다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처방인데, 과연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를 건져 올리기에 충분한가에 있다. 이 지점에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줄곧 제기되고 있는 ‘소득주도 성장 전략 대 혁신 성장 전략’에 대한 논쟁이 자리한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대기업·수출 중심의 경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임금 등 노동자의 소득을 늘리고 교육과 복지정책 등을 통해 사람에 대한 투자 확대에 중점을 두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소득 양극화 해소가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히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 강조하고 있는 일자리 확대와 최저임금 인상(올해 6470원→내년 7530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격차 해소 등이 모두 이 일환이다.

소득(임금)이 오르면 소비가 늘고, 소비가 늘면 투자와 생산이 늘어나 경제가 성장하게 된다는 소득주도 성장론이 성장의 엔진을 수요 측면에서 찾는다면, ‘혁신 성장’은 공급 측면에서 찾는다. 규제 개혁과 신산업 발굴, 창업 지원 등으로 경제의 공급 부문을 혁신해 일자리를 만들고 소득을 늘려 구매력을 키우자는 성장 전략으로 이해된다. 경제부총리의 말을 빌리면 혁신 성장은 경제와 사회의 효율을 업그레이드해 파이를 키워서 지속 가능한 경제를 만드는 것이다.

경제정책 성공하려면 ‘정치’를 해야

원론적이지만 ‘혁신’은 경제 주체가 기존의 익숙한 자원 배분과 생산방식을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바꾸는 것을 촉진한다. 노동력과 자본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향해 움직이는 경제 시스템이 곧 혁신이다. 문제는 새로운 기회가 창출되는 과정에서 경제의 불안정성이 커진다는 사실이다. 도태되는 기업과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가 생긴다. 그러나 고용과 자본을 조정할 여지를 막으면 경제의 신진대사가 막히고 생태계를 해치게 된다. 결국 경제에 혁신을 불어넣되 이 과정에서 탈락하는 그룹에게는 소득을 지원하고 시장 재진입을 돕는 안전망 정책을 써야 할 것이다.

9월 말 국무회의 석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소득주도 성장 전략 못지않게 혁신 성장이 중요하다”라며, 혁신 성장의 개념 정립과 집행 전략 수립을 지시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J노믹스’의 기조가 혁신 성장으로 급격히 옮아가리라고 보지만 소득주도 성장 전략을 폐기했다고 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이른바 ‘60년 만의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면서 의도적으로 소득주도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강조한 흔적이 짙고, 예고한 대로 혁신 성장에 대한 검토를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시사IN 양한모

언론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장 실장이 행한 유일한 인터뷰가 있긴 하다. 9월7일 청와대가 내놓은 ‘국민을 대신해 묻고 답하다. 친절한 청와대-장하성 실장 편’이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여러 차례 국가의 역할과 정의를 강조했다. 불완전한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는 국가의 역할을 말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도 꺼냈다. 정의에 대해서는 ‘각자 노력한 만큼 응분의 몫을 나눠 갖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과 ‘정당화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 존 롤스의 정의론을 거명했다. 그의 이런 인식이 잘 녹아 있는 대목은 끝 무렵에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앞으로 5년 동안 국가경제가 성장한 만큼 국민의 삶도 함께 나아지는 ‘정의로운 경제, 국민이 잘사는 경제’를 만드는 게 국민이 촛불로 정권을 맡겨준 것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이 인터뷰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대목은 대통령 관련 내용이었다. 100일 동안 지켜본 소회를 묻자 그는 “비슷한 생각과 이상을 가진 좋은 보스를 만났다”라며, 대통령과 자신의 관계를 19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 정상에 오른 뉴질랜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그의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에 빗댔다. 둘이 같이 올랐지만 세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가로 노르가이를 꼽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힐러리를 꼽듯이 대통령이 국정 목표 혹은 성공한 정부라는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데 자신은 기꺼이 셰르파가 되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장 실장은 대통령이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문재인 정부의 제갈량’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실제로 대통령이 집무실에 걸어놓고 챙긴다는 일자리 문제와 경제·사회 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특급 참모이다. 그가 진정으로 제갈량 혹은 텐징 노르가이가 되려 한다면, 그리하여 ‘정의로운 경제, 국민이 잘사는 경제’를 실현하고 싶다면 ‘정치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 여의도 정치에 풍덩 빠지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민에게 이로운 정책도 여의도 공간을 통과하지 않으면 빛을 볼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DJ)은 1960년대부터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함께 갖춰야 한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교수 출신치고 그만한 현실감각과 대안 제시 능력, 정무감각을 가진 이가 없다”라는 평이 나오니, 그는 DJ의 정치인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정치를 하고 싶지 않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다”라고 자평하는 이가 장하성 실장이다.


장영희
1989년 8월 원 〈시사저널〉의 공채 창간 요원이 되었다. 경제 기자로서 재벌 개혁 이슈, 특히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문제에 매달리다, 2005년 9월 추석 합병호(제830·831호) 때 75쪽에 달하는 거의 통권기획 ‘삼성은 어떻게 한국을 움직이나’를 책임 기획하고 커버스토리를 썼다. 2006년 6월 데스크(취재총괄부장)로 문제의 삼성 관련 기사를 세상에 내놓아 ‘〈시사저널〉 사태’의 한복판에 섰다. 편집권 독립 투쟁이 무위에 그쳐 2007년 6월 〈시사저널〉과 결별하고 〈시사IN〉 법인 설립과 창간 작업에 사활을 걸었다. 2008년 말 ‘데드라인’을 벗어났다. 지금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과 시청자 방송 참여를 지원하는 공공기관인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기자명 장영희 기자(1989~2008 재직)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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