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
2003년 3월17일 〈시사저널〉 지령 700호 기념탑과 서명숙 당시 편집장.

2003년 어느 봄날. 그 봄이 그토록 잔인하게 전개되리라는 그 어떤 조짐도 없었다. 그 봄에 내가 청춘을 불사르면서 14년간이나 다니던 직장을 내 발로 떠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느 해처럼 길고 긴 서울의 겨울이 긴 옷자락을 끌면서 서서히 물러갔고, 추위를 진저리치게 싫어하는 나는 서울의 봄을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변 상황도 ‘꽃피는 봄날’ 그 자체였다. 1년8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주인 없이 망망대해를 힘겹게 항해하던 원 〈시사저널〉이 서울문화사라는 새 주인을 만난 지도 어언 3년을 넘어섰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너인 심상기 회장은 당시 〈시사저널〉 편집국 구성원들과 큰 마찰이나 갈등이 없었고, 〈시사저널〉 특유의 전통과 분위기를 제법 존중해주었다(이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는 훗날 밝혀지지만).

내가 심 회장으로부터 시사 주간지 사상 처음으로 여성 편집국장으로 임명된 것은 2001년 7월. 심 회장이 썩 내켜서, 자발적으로 나를 낙점한 건 아니었다. 전임 편집국장인 김상익 선배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돌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회사 처지에서 언론이라는 전쟁터의 총사령관 자리를 그렇게 오랫동안 비워둘 수는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넘버 2’인 나를 편집국장으로 택한 셈이었다.

심 회장은 나를 따로 불러 임명 사실을 통보하면서 “취재원, 독자, 취재기자의 8할이 남성인 시사지에서 여성을 국장으로 임명하는 건 굉장한 모험이다” “그만큼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심 회장의 지나친 인사치레 때문이었을까.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 하는 자부심과 함께 ‘서열 2위 취재1부장이 편집장으로 올라가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하는 반발심이 묘하게 뒤엉켰다.

복잡한 심경 때문에 아무 말 못하는 내가 승진에 감명받아서 오너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부하 직원으로 보였던 것일까. 같은 말을 다양한 버전으로 되풀이해 강조하던 심 회장은 급기야 내 귀를 의심케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의 유명 잡지 편집장은 일을 정말 열심히 한다고 주위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결국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데스킹하던 중 과로로 순직했다. 나는 서 편집장도 그럴 각오로 일에 임했으면 좋겠다.” 순간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갔다. “저도 일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책상에서 일하다가 돌연사하기는 싫은데요?” 갑자기 단호한 어투로 반박하자 심 회장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 그만큼 열심히 하라는 덕담을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나?” 하고 얼버무렸다.

회장의 주문 때문만이 아니라 첫 여성 편집장으로서 주위의 기대도 쏟아졌고 나 자신도 잘해내고 싶어서, 나는 이전보다도 더 회사 일에 매달렸다. 말 그대로 ‘월화수목금금금’이었다. 그땐 월요일이 최종 마감인지라 토·일요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한 채 늘 뉴스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잡지 맨 앞머리를 장식하는 ‘편집장의 편지’를 무슨 주제로 어떻게 쓸 것인가, 늘 고민을 안고 살았다.

잡지가 가판대에 깔리는 날에는 사옥이 있는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 걸어가면서 가판대에 〈시사저널〉이 얼마나 좋은 자리에 전진 배치되어 있는지, 이번 주 표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지를 일일이 체크하고 다녔다. 얼굴이 익숙해지자 ‘아줌마 얼굴 봐서라도 잡지를 목 좋은 자리로 배치해준다’는 가판 주인이 생겨날 정도였다.

모두가 예전의 영광을 재현해보자며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면서 매진한 덕분인지 〈시사저널〉은 황금기만큼은 아니지만, 가판과 정기구독자 수에서 다시 1위 자리를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심 회장은 매주 회의 때마다 편집국의 이런 성과를 칭찬하면서 “조금만 더”를 강조했다. 끝없는 실적 독려에 피로감이 조금씩 느껴졌다. 하지만 모기업의 부도로 ‘비바람 찬 이슬을 맞던’ 시절에 비하면 꽃피는 봄날 아니냐고 편집국 간부들은 서로 위로했다. 그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들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상황이 그러했다.

어느 봄날에 닥친 일

다시 4월 어느 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날 심 회장은 우리 편집국 간부들을 불러서 그야말로 ‘폭탄 발언’을 내놓았다. 이제까지 본인이 그룹 전체의 회장이면서 〈시사저널〉 사장을 겸했지만, 직접 〈시사저널〉을 챙길 사장이 따로 있어야 할 것 같단다. ‘아니, 오너 아닌 전문경영인 사장이라니? 옥상옥도 아니고 이건 또 뭔 소리야? 재정이 어렵다고 편집장 법인카드도 안 내주면서 월급 사장을 데려온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난 대놓고 심 회장에게 반박했다. “사장 월급 줄 돈이면 편집국 신입 기자나 두어 명 더 뽑아달라”고. 심 회장은 뜻밖의 반격에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사장은 이미 내정되었고, 이틀 후에 출근하기로 약조가 되었단다. 그야말로 ‘헐’이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금창태씨란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사장을 영입해오는 것도 기가 막히는 판에, 내정된 인물이 보수 일간지 〈중앙일보〉에서도 대표적인 보수 우익으로 알려진 금창태씨라니! 누가 보더라도 당시 〈시사저널〉 구성원들과는 결이 다르고 코드가 맞지 않을 게 불 보듯 뻔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오너라지만, 적어도 언론사, 그것도 우리 사회에서 나름 일정한 영향력과 자기만의 색깔을 견지해온 매체의 사장으로 그 매체와 컬러가 완전히 다른 인물을 한마디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임명하다니…. 깊고도 쓰라린 모멸감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그날 저녁 편집국 간부들(나, 문정우 취재1부장, 이문재 취재2부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피로감, 무력감, 배신감, 분노, 좌절감이 당시 우리들을 지배한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끼리 ‘연안 대장정’이라고 불렀던, 부도 이후 견뎌온 1년8개월을 안주거리 삼아 술을 마셨다. 부도 이후 월급조차 안 나오는 상황이 계속되자 33명에 이르던 기자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났고, 그 시절의 쓰라림을 우리 세 사람은 공유하고 있었다.

〈시사저널〉이라는 제호를 지키기 위해, 그 제호를 이어나가기 위해, 그 제호를 살려줄 주인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매주 정말이지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노예들처럼 무겁고 지친 발걸음을 힘겹게 떼놓으면서 회사로 출근하곤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도시락에 물을 말아 억지로 퍼먹으면서 기사를 쓰던 그 시절의 기억이 어제 일인 듯 생생했다.

그렇게 힘들게 제호를 지켜낸 결과 새로이 주인을 맞았건만, 그 뒤로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 회장이 회사를 인수한 뒤 이른바 고문으로 영입한 언론계 원로들과 편집국 간부들이 매주 편집회의라는 이름 아래 머리를 맞대야 했던 것이다. ‘고문단’들은 매주 기자들이 낸 기획안에 시시콜콜 간여하는가 하면 새로운 안건을 제안하기도 했다. 개중에는 일부 반영할 만한 아이템이 있기도 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후배 기자들이 알면 펄쩍 뛸 만한 어처구니없는 주제이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간부들은 머리를 굴려가면서 이들 제안을 요령껏 거절하거나, 완곡하게 피해가곤 했다. 그도 저도 안 되면 공무원들처럼 “적극 검토하겠다”라고 말한 뒤 유야무야 뭉개는 작전을 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사장이라니….

문정우는 간부들이 너무 말을 안 듣다 보니 심 회장이 편집국을 제압할 관리인을 직접 데려온 것 아니겠느냐며 나름의 해석을 내놓았다. “따지고 보면 오너 말 죽어라고 안 들은 우리가 자초한 사태일지도 모르죠 뭐”라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떡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술자리의 마지막 안주였다. ‘사장 취임을 아예 반대할 것인가?’ 우리 셋 다 그 대목에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또다시 싸워야 한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피로감이 밀려왔다.

설왕설래가 계속되던 중 문정우가 갑자기 단호한 표정으로 선언하듯 툭 내뱉었다. “난, 이참에 사표 낼 생각이에요. 뭐, 절이 싫어지면 중이 떠나야지요. 할 만큼 하기도 했고, 이만하면 떠나도 미안할 일도 없고요. 무엇보다 정말 지치네요.”

문정우는 부도가 난 1년8개월의 대장정 기간에 단 한 번도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말끝마다 ‘이젠 정말 그만두자’라고 징징거리던 나와는 달랐다. 그런 그가 그만둔다면 정말 그만두겠구나, 싶었다. 이런 든든한 동료 없이 회사를 다니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나 또한 지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얼굴을 푹 숙인 채 술만 마시던 이문재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술자리의 마지막 결론은 ‘우리는 할 만큼 했고 지칠 대로 지쳤으니 셋 다 동반 사표를 내고서 초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회장에게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하고 앞날은 후배들에게 맡기자.’ 결론을 내린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선 택시 정류장까지 행진했다.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집단으로 실성했나’ 하는 눈길로 쳐다봤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문정우로부터 늘 ‘귀가 얇다’는 놀림을 받아온 나답게, 친하게 지내던 언론계 대선배를 만난 뒤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분은 “그동안 쌓은 경험이 너무나도 아깝다. 어떻게 키워오고 지켜온 매체냐. 그렇게 떠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으면 간부 보직만 사퇴하고 그 좋아하는 현장 기자로 돌아가면 되지 않겠는가”라며 나를 간곡하게 설득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마음을 바꾼 나는 두 사람을 설득하는 일에 나섰다. 이문재는 망설이던 끝에 마음을 돌렸지만, 문정우는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문정우에게 무릎을 꿇다시피 사정을 했고, 어렵사리 그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당신은 좌요, 우요?”

그다음 날 금창태 사장이 첫 출근을 했다. 그는 취임식 직후 나를 사장실로 따로 불렀다. 보직 사퇴서를 내기 전인지라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내게 ‘고려대 선후배’의 학연을 들이밀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연 맺기 방식이었다. 걸핏하면 학연으로 그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는 태도 때문에 대한민국이 ‘학연·지연·혈연의 나라’가 된 것 아닌가. 그런 세태를 비판하는 칼럼을 쓰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그런 학연에 기대곤 하는 언론인들을 난 늘 역겨워했다(금 사장님, 번지수를 잘못 짚으셨습니다!).

그런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폭포수처럼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다. “고대 선후배끼리 서로 합심해서 회사를 잘 이끌어가자” “나는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구원투수로 나선 사장이다. 언젠가는 편집국 출신이 사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도와주면 나도 서 편집장이 최초의 여성 사장이 되도록 열심히 밀어주겠다” “고대 출신만이 받는 ‘자랑스러운 언론인상’이 있는 거 아느냐. 내가 1995년에 받은 상이다. 서 편집장도 받을 수 있도록 애써보겠다” 등등.

타 매체 출신인 그로서는 〈시사저널〉 원년 멤버이자 고려대 후배인 내 조력이 절실했을 터. 그래서 자기 딴에는 엄청 달콤하고 유혹적인 ‘딜’을 제안한 셈이지만,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내 안에서는 ‘이 사람 밑에선 절대로 간부를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확신만 커져갔다. 그동안 윗사람들을 여럿 거쳤지만, 노골적으로 이런 식의 딜을 제안하는 사람은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십수 년 취재해온 정치권에서야 많이 보고 들었지만.

이는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튿날 그는 나를 또다시 사장실로 불렀다. 첫날이 달콤한 유혹의 자리였다면, 둘째 날은 심문의 자리였다. 그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전날의 미소 띤 표정과는 달리 근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서 편집장은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 내 귀를 의심했다. ‘일제 치하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웬 좌파, 우파?’ 2000년대 초반이었던 그 무렵에는 ‘좌파’나 ‘우파’라는 용어가 지금처럼 널리 쓰이지 않았다. 진보·보수 식의 이분법 정도가 쓰였을 뿐이다. 기가 막혀서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자니 그가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톤으로 물었다.

그 순간, 난데없이 대학 시절의 악몽이 떠올랐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눈을 가리고 끌려간 그 시절, 나는 그곳에 있는 형사들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똑같은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악질적으로 괴롭혔던 이가 수사계장이라는 인물이었다. 20년 넘게 잊고 살았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금 사장 얼굴에 겹쳐져 떠올랐다.

비양도에서 다시 사표를 결심하다

그러나 난 더 이상 순진한 여대생이 아니었다. 언론계에서 농담처럼 얘기하듯 ‘산전수전 공중전 백병전’까지 다 치러본 중년의 베테랑 기자이자, 후배 기자들이 벌벌 떠는 ‘악질’ 편집장이었다. 난 짐짓 질문의 의도를 모르는 척 눙쳤다. “기자에게 무슨 좌우가 있나요? 전 그저 실사구시 좌충우돌파입니다. 하하.”

사실 ‘실사구시, 좌충우돌’은 기자들이 늘 하던 말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는 원 〈시사저널〉의 방향성이기도 했다. 팩트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좌파 정권·우파 정권 가리지 않고 비판할 건 비판하다 보니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언론의 숙명이자 소임이라고 여기고 살아온 우리들이었다. 나로서는 농반진반의 대답이었다.

금 사장은 초반보다 더 딱딱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질문의 취지를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봅시다. 예를 들어 매년 신년 특집호에 〈중앙일보〉에서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물어보는 앙케트가 나오잖아요? ‘매우 진보’(1점)에서 ‘매우 보수’(10점)까지 척도를 매겨서요. 그 기준으로 보자면 본인은 어디에 해당된다고 스스로 평가하나요?” ‘어제는 정치인처럼 딜을 제안하더니, 오늘은 형사로 돌변해서 취조를 하는구나.’ 난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올까 잠시 망설이다가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굳이 꼭 척도로 평가를 한다면 중도쯤 되지 않을까요?”

금 사장은 아무 말도 없이, 그러나 의심이 역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좋은 말 할 때 제대로 불지?’ 하는 듯한 형사의 표정이었다. 나 자신이 매우 비겁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얼른 다시 대답을 고쳐 말했다. “저는 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남들이 보기에는 아마 중도 좌파쯤으로 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갑자기 그가 얼굴을 확 펴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중도 좌파? 그거 아주 좋아요. 언론인에게 바람직한 스탠스예요. 내가 바로 그거예요. 앞으로 서 편집장도 흔들리지 말고 그 스탠스를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었다. 〈중앙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진통하는 대학가’처럼 학생운동을 좌파로 매도하고 딱지를 붙이는 대대적인 시리즈물을 내보내곤 했다. ‘그래 놓고는 중도 좌파라니, 그럼 나를 극좌파쯤으로 생각했다는 건가?’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쭉 지나갔다.

면담을 마치고 편집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사흘간 휴가원을 제출했다. 고향 제주도로 내려가서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었다. ‘사표를 낼 것인가, 남아서 버틸 것인가.’

오랜만에 찾은 고향 제주에서 처음 이틀은 오로지 뒹굴거리기로 일관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아서였다. 친구·후배네 집에서 아침 먹고 자고, 깨어나서 점심 먹고 다시 혼절하듯 잠에 빠져들고, 그러다 일어나서 저녁 먹고 또 잠을 잤다. 이런 나를 이틀간 지켜보던 친구 허영선(시인)이 사흘째 되는 날 “비양도에 함 다녀올까?”라고 조심스레 제안을 해왔다.

비양도? 들어보긴 했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섬이었다. 제주도 서해안 한림 앞바다에 떠 있는, 자동차를 타고 지나던 길에 본 기억만 어렴풋한 섬.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기에 그녀를 따라나섰다. 한림항에서 배를 타고 15분여. 제주 본섬이 시야에서 멀어지는가 싶더니 비양도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보면 보아뱀을 삼킨 코끼리처럼 생긴 섬이었다. 드라마 〈봄날〉이 이곳에서 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우리를 맨 처음 반겼다. 항구 근처에는 동화에 나옴직한 아담한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곳 운동장에 매달린 그네에 앉아 흔들리면서 저 멀리 본섬과 난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부터였으리라. 딱딱하게 몇 겹씩 굳은 채 냉동되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은.

친구를 따라 그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비양봉에도 올랐다. 오름을 올라가는 길섶에 보랏빛 들꽃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름을 물어보니 ‘갯무우꽃’이란다. 처음 듣는 꽃 이름이었다. ‘국회의원 이름은 100명도 넘게 외고 있으면서 갯무우꽃 이름 하나 모르고 살았구나’ 싶었다.

비양봉 정상에 올라 바라보니 사방이 온통 바다, 바다, 바다였다. 두 팔을 뻗으면 다 바닷물에 젖을 것 같았다. 이윽고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지상에서 가장 황홀한 시간이 다가왔다. 태양은 하늘만이 아니라 바닷물까지 선홍빛으로 물들이면서 제 몸을 살랐다. 그 순간,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내 고향인데도 그동안 지는 노을, 뜨는 태양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살다니….’ 대도시 서울에서 날마다 숨 가쁘게 전개되는 뉴스를 쫓아다니느라 정작 자신은 돌보지 못하고 산 나 자신이 너무나도 불쌍하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소녀에게 손을 내밀고 보듬어주었다. ‘울지 마. 이제부터는 널 외롭게 놔두지 않을게’라는 다독임과 함께.

다음 날 아침 예정대로 서울로 올라온 나는 출근하는 대신 후배 컴퓨터를 빌려 회사에 이메일로 사표를 보냈다. 곧 문정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사표를 먼저 얘기한 것은 자기인데, 선배 혼자 이렇게 불쑥 사표를 던져버리면 자신은 어떡하느냐며 펄펄 뛰었다.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지만 나는 비양도에서 내게 한 약속을 어길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조직이나 일보다 나 자신을 먼저 돌보겠노라는.

편집국 후배들은 기자총회까지 열어서 나의 전격적인 사표 제출을 비판하는 한편 나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금창태 사장이 문제라면 같이 싸우겠다는 그들에게 나는 눈물로 호소했다. 지금 문제는 금 사장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더 늦기 전에 조직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싶다고. 내 결심이 워낙 확고해 보였는지 후배들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나는 쉬면서 기운을 차린 뒤 나중에 도울 일이 생기면 미력이나마 꼭 돕겠노라고 약속한 뒤 회사를 떠났다(당시만 해도 실제로 그럴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거운 마음으로 떠난 산티아고 길

그 뒤 나는 2년간 백수 생활을 하다가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거듭된 부탁에 언론사 편집국장으로 다시 복귀했다. 쉬면서 배터리를 약간은 충전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데다 인터넷 매체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 내 ‘버킷리스트’였던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기 위해서는 돈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사이 원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과 편집국 후배들은 그럭저럭 외견상 큰 마찰 없이 한 조직 안에서 잘 지내는 듯했다(나중에 들어보니 이런저런 소소한 갈등은 늘 있었던 모양이다). 잘되었다 싶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늘 께름칙했다. 그런데 2006년 여름, 갑자기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금창태 사장이 삼성 이학수 부회장 관련 기사를 인쇄 공장 윤전기가 돌아가는 와중에 편집국장과 상의도 없이 빼버렸고, 이에 반발해 편집국장이 사표를 내자 곧바로 이를 수리해버리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원 〈시사저널〉 역사상 경영진이 편집국의 동의 없이 기사를 인쇄 단계에서 뺀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물론 동의하에 그런 일이 벌어진 적도 없었다). 편집국장의 사표를 하루 만에 전격 수리한 것 또한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금창태 사장은 삼성그룹과 인연이 있는 〈중앙일보〉 내에서도 ‘친삼성 인사’로 소문난 인물이었다고 들었다. 그렇다 해도 이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편집국장의 최종 오케이를 받은 기사를 윤전기를 세우고 뺀다는 건 편집권을 침해하는 가장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간섭·개입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시사IN 포토2006년 6월23일 삼성 기사 무단 삭제에 항의해 원 〈시사저널〉 기자들이 금창태 당시 사장(맨 오른쪽)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원 〈시사저널〉 후배들은 그때부터 경영진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국장의 사표 반려와 경영진의 사과 및 재발 방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악화일로를 걷는 듯했다. 그 무렵 나는 〈오마이뉴스〉를 사직하고 산티아고 길을 걸으러 떠나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친정이나 다름없는 원 〈시사저널〉 후배들이 어려운 지경에 처한 와중에 자리를 비우게 됐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어떻게든 해결이 되겠지’ 하고 애써 자위하면서 길을 떠났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나는 800㎞의 길을 36일 동안 걸으면서 가는 곳마다 성당에 들러 촛불을 켜고 기도했다. 사춘기의 터널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어린 시절 직장 일에 전념하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내 아들을 위해. 그리고 ‘연안 대장정’의 피로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번에는 자본의 압력에 맞서 언론의 상식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내 후배와 동료들을 위해.

 

ⓒ시사IN 포토2007년 6월26일 전원 사표를 내고 울먹이는 이숙이 당시 〈시사저널〉 기자(왼쪽)와 필자.

2007년 초 오랜 여정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기도한 보람도 없이 〈시사저널〉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자들은 아예 파업에 돌입한 상태였고, 경영진은 취재기자들이 다 빠진 자리를 외부 기고가들로 채워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작금의 MBC, KBS 사태를 연상해보시라). 제호는 동일하되 같은 잡지라고 할 수 없는 ‘짝퉁’ 〈시사저널〉이 버젓이 독자들 손에 배달되고 가판에 진열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반론권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오마이뉴스〉 이한기 편집국장에게 이 문제에 대해 칼럼을 기고하겠노라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나아가 자신도 이 사태를 매우 엄중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면서 아예 언론 종사자와 전문학자들을 총동원해서 시리즈 기사로 내보내겠다는 역제안을 해왔다. 그 첫 기사로 내 칼럼을 싣겠다는 것이었다.

‘15년 내 청춘을 다 묻은 매체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 걸까.’ 온갖 기억이 물밀듯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창간 무렵(1989년) 장안의 화제를 불러모았던 올 컬러 편집, 매주 어떤 주제를 커버스토리로 올릴까 격론을 벌였던 전쟁터 같은 편집회의, 청와대에서부터 삼성·검사·조폭 등 온갖 권력 집단과 이해집단으로부터 끊이지 않고 제기됐던 소송들, 우리 모두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은 갑작스러운 모기업의 부도와 ‘연안 대장정’ 등등…. 그렇듯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으로 지켜온 매체를 고작 한 재벌 기업의 기사(그 기업이 아무리 대한민국 최대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때문에 이토록 깊은 수렁에 빠지게 만들다니,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가 새삼 치솟았다.

2007년 1월11일, 내 칼럼이 ‘짝퉁 시사저널을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 메인 화면에 걸렸다. “함께 울어줄 문상객도 찾아주지 않는 적막한 상가에서, 머리 풀어헤치고 곡(哭)한다”라고 적은 이 글에서 나는 ‘〈시사저널〉 사태’의 비극성을 고발하는 한편, 이 사태가 삼성과 연관됐다는 이유만으로 사상 초유의 사태 앞에서 침묵하는 한국 언론의 행태를 질타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승강기 안에서 금창태 사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각오한 일인지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가슴은 쿵쾅거렸다. 노회한 금 사장은 아마추어처럼 노발대발하거나 화부터 내지는 않았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라고 안부부터 챙긴 뒤 칼럼을 잘 봤다는 인사까지 곁들였다. 그러더니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런 실수를 했느냐. 적어도 당사자인 나를 만나서 취재를 하고 반론권을 보장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본론을 꺼냈다.

이미 예상한 공격이었기에 나는 준비한 답변을 내놓았다. “사장님, 저는 의견을 개진하는 칼럼을 썼으니 굳이 반론권을 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드러난 사실만 썼기 때문에 팩트 확인을 위해 사장님을 만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정 못마땅하시면 이렇게 개인적으로 전화하실 게 아니라 소송을 거십시오.” 그가 늘 강조했던 ‘고대 선후배지간’의 통화는 이렇게 끝이 났다.

며칠 뒤 밤늦게 집에 들어갔더니 친정어머니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보내온 출두통지서였다. 예상대로 금창태 사장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내게 소송을 걸었고, 이로 인해 경찰 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대학 4학년 때 교생 실습하러 고향에 내려온 딸이 자기 눈앞에서 형사에게 붙들려 서울로 압송되는 걸 지켜봤던 어머니에게 경찰은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고, 그 트라우마는 세월이 흘러도 조금도 옅어지지 않은 듯했다.

며칠 뒤 지정된 날짜에 종로경찰서를 찾았다. 뜻밖에도 여자 형사가 나를 맞이했고, 그녀는 매우 정중하게 심문을 진행했다. 나 역시 이미 떠난 직장 문제에 왜 ‘외부세력’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는지 성심을 다해 설명했다. 직장을 떠날 때 후배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게 만든 건 다름 아닌 회사의 경영진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 뒤 사태는 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파업에 돌입한 동료 후배들은 거리에서 오랜 세월 피켓과 마이크를 잡고 언론 자유를 외쳤다. 그러나 회사 측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후배들을 줄줄이 징계하거나 고소했다. 오랫동안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던 그들은 마침내 개미 주주들의 성원으로 새로운 매체 〈시사IN〉을 창간했다. 내가 고향 제주로 돌아와 제주를 한 바퀴 걸어서 여행하는 길 올레 1코스를 처음 개장한 그해였다. 올해로 〈시사IN〉도, 제주올레도 둘 다 출범 10주년을 맞이했다. 따지고 보면 둘 다 금창태 사장의 취임을 계기로 그 싹이 트기 시작한 셈이니, 그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시사IN 고재열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올레를 낸 후 이를 수출해 규슈올레와 몽골올레를 냈다.
위는 서 이사장이 몽골올레 테를지 코스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서명숙
대한민국에 ‘올레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주인공. 걷기 여행 열풍을 일으킨, 걷는 길 올레를 내는 여자. 1957년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출생. 원 〈시사저널〉 정치부 기자, 취재1부장, 편집장,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내며 23년을 기자로 살다가, 남들이 다 말리는 ‘미친 꿈’에 빠져 길을 내는 사람이 되었다. 〈제주올레여행-놀멍 쉬멍 걸으멍〉 〈흡연 여성 잔혹사〉 〈식탐-길 내는 여자 서명숙 먹으멍 세상을 떠돌다〉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영초언니〉 등을 펴냈다.
 

 

 

 

 

기자명 서명숙 기자(1989~2003 재직)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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