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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었는가 넋이여, 함께 가는가 생명이여”

16년 만에 다시 찾은 ‘지리산 850리 도보 순례’, 이념 갈등·속도 지상주의 여전… ‘걷기와 언론’을 생각하다

이문재 기자(1989~2005 재직)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0월 25일 수요일 제5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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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는 한산하고, 날씨는 쾌청했다. 16년 만에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 지난 9월 중순, 2001년 5월에 밟았던 지리산 기슭을 다시 찾았다. 16년이라, 짧다고 해야 할지, 길다고 해야 할지. 그사이 나는 40대 초입에서 50대 후반으로 훌쩍 넘어왔다.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라는 만해의 시구절이 옳다면, 나는 그사이 충분히 게을렀다. 느림의 시학을 강조해온 글쟁이가 너무 바빠서 정작 중요한 국면에서 게으르지 못했던 것이다.

ⓒ백승기 기자
2001년 5월 원 <시사저널> 도보 순례 연재 기사(가운데).
그해 봄 지리산에서 분단 이후 최초로 좌우 대립으로 희생된 넋을 기리며 생명 평화의 미래를 모색했다.
최참판 댁이 올려다보이는 평사리 들판(맨 위쪽)을 지나 섬진강 백리길을 다시 걸었다(위쪽).

오랜만의 출장이었다. 2005년에 기자 생활을 접은 뒤 12년 만에 기자로 돌아간 것이다. 사진기자로 정년퇴직한 백승기 선배까지 동행했으니 ‘정식 취재’였다. 남원 실상사에 도착할 때까지 지나간 시간들이 수시로 출몰했다. 1989년 원(原) <시사저널> 창간 무렵의 시행착오에서부터 2006년 ‘<시사저널> 사태’의 우여곡절을 지나 2017년 <시사IN> 창간 10주년의 꿋꿋함에 이르기까지 지난 28년이 교차했다.

지난 7월, 원 <시사저널>에 몸담았던 ‘예비역’들 사이에서 <시사IN> 창간 10주년 지면을 꾸려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2006년 파업 이전의 <시사저널>과 <시사IN>의 정신적 연속성을 재확인해보자는 취지였다. 2006년 당시 <시사저널> 사명(社名)이 독립신문사였고 현재 <시사IN> 사명이 참언론사다. 독립언론과 참언론의 만남이라니! 나는 동의했다.

‘독립’과 ‘참’이 다르지 않다면, 그리하여 ‘독립’과 ‘참’이 어떤 경우에도 물러설 수 없는 언론의 최후 저지선이라면, 전·현직 기자들이 만드는 지면이 현 언론 상황에 던지는 메시지가 없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현재 우리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언론은 무기력을 넘어 패배주의에 기울고 있다. 자본의 논리 앞에서 고개를 못 들고 있다.

예전에 쓴 기사는 읽지 않기로 했는데…

다시 기사를 써보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바로 떠오른 것이 지리산이었다. 지면으로는 얼추 마무리했지만 온라인으로는 끝을 맺지 못한 기획 기사였다. 더 큰 이유가 있다. 2001년 거행된 ‘지리산 위령제’는 16년이 지난 오늘에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위령제의 취지는 현재도 엄연하다. 또한 위령제의 일환으로 진행된 도보 순례는 이후 ‘지리산 둘레길’로 거듭나 걷기 열풍의 도화선 구실을 해냈고 사회적으로는 삼보일배, 탁발 순례로 확산됐다.

2001년 5월26일 지리산 달궁에서 ‘지리산 위령제’가 거행됐다.
위는 당시 <시사저널> 지면.

‘예전에 쓴 글은 읽지 말라.’ 후배 기자들에게 던지던 농담 비슷한 충고다. 예전 글을 다시 읽으면 100% 낭패를 본다. 예전에 쓴 글이 좋아 보이면 지금 내 사유가 후퇴했다는 증거다. 반면에 예전 글이 수준 이하로 보이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얼굴이 벌게진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내가 발표한 글, 특히 기사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원칙을 포기했다. 후일담을 쓰려니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으로는 성이 안 차 <시사IN> 편집국으로 달려갔다. 사진과 지면 구성을 다시 봐야 했고 종이 촉감도 그리웠다. ‘잠들어라 넋이여, 함께 가자 생명이여.’ 2001년 5월17일자(<시사저널> 제603호) 스페셜리포트 제목이다. 부제는 ‘지리산 850리 도보 순례 현장 중계(1)’. 깃발을 들고 엄천강 인근 농로를 걷는 행렬 사진이 두 페이지에 걸쳐 있고, 지도로 순례 구간과 일정이 소개돼 있었다. 편집자 주가 새삼스러웠다.

‘지리산 위령제는 (…)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어루만지며 상생의 논리에 바탕을 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시사저널>은 지역, 종교, 이념의 벽을 허물고 민족 화합과 생명 평화를 위한 대장정, 지리산 850리 도보 순례에 동참해 지리산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온몸으로 느껴보고자 한다. 더 다양하고 상세한 기사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중계하고 있다.’

그해 2월부터 남원 실상사를 중심으로 7대 종단이 손을 잡고 위령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범종교계가 지리산 일대에서 좌우 대립으로 스러져간 넋을 기리는 동시에, 개발과 성장 중심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생명과 평화의 미래를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도보 순례는 지리산 위령제를 상징하는 실천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당시 나의 고민은 온라인 중계였다. 새천년 전후 종이 매체들은 앞다투어 자사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마감 개념을 뒤흔들었다. 일간·주간·월간의 경계가 무너졌다. 누가 먼저 인터넷에 올리느냐가 관건이었다. 홈페이지 방문객 수도 적잖이 신경 쓰였다. 나는 도보 순례를 온라인으로 중계하면 홈페이지가 활기를 띨 것이라고 주장했다.

내가 온라인 중계를 내세운 데에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출장 허가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주간지에서 ‘국내 출장 15일’은 흔치 않다(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출장 명령이 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김상익 편집장이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경영진은 물론 일부 기자들도 지리산을 한 바퀴 도는 게 무슨 뉴스 가치가 있느냐며 항의했다는 것이다. 나는 저런 사정도 모른 채 사진부 안희태 기자와 짐을 꾸렸고, 15일간 길에서 길로 출퇴근했다.

두 발로, 몸으로 돌아가기의 어려움

몸에 밴 리듬이 있어 지면 마감은 큰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온라인 중계는 처음이었다. 매일 오후 사진과 기사를 올려야 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도 가능하지만, 16년 전에는 사정이 열악했다. 오전에는 순례단과 함께 걷고 오후에는 PC방이 있는 면 소재지를 수소문했다. 썰렁한 시골 PC방에서 내가 기사를 쓰면 안희태 기자가 사진과 함께 업로드했다. 행렬에서 벗어나 마감하고 저녁에 다시 합류하는 강행군이 반복됐다. 결국 순례 후반부에 온라인 중계를 포기하고 말았다.

순수한 순례단원으로 참여했다고 해도 만만치 않았을 일정이었다. 몸이 걷는 능력을 되찾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사이 몸 여기저기서 신호가 왔다. 촛대뼈(정강이뼈)가 쑤시고 척추에 탈이 났다. 순례 또한 단순한 걷기의 연속이 아니었다. 양민 학살이 있었던 곳에서는 위령제를 지내고, 댐이나 골프장 건설 예정지에서는 주민과 함께 반대 시위를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주민을 위한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지역 시민·환경단체와 간담회도 열었다.

도보 순례는 2001년 5월3일 오후,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분교에서 출발했다. 순례단은 대학생, 귀농인, 활동가 등 총 22명으로 구성됐지만 구간별로 종교인, 지역 학생, 시민단체 등이 참여해 규모와 성격이 날마다 달라졌다. 순례단은 지리산을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함양에서 시작해 산청, 하동, 구례, 남원을 거쳐 실상사에서 대장정을 마치는 일정이었다. 순례단 단장은 수경 스님, 현장 실무는 이원규 시인(당시 지리산살리기국민운동 사무국장)이 맡았다.

이번에도 이원규 시인의 신세를 져야 했다. 미리 전화를 걸어 지리산 도보 순례 ‘후속 기사’를 준비한다고 했더니 흔쾌히 앞장서겠다고 했다. 이 시인은 제법 알려졌거니와 1997년 지리산으로 깃든 이래 줄곧 시 창작과 생명평화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난 십수 년간 실상사 스님들과 함께 지리산뿐 아니라 새만금과 4대강을 살리기 위해 삼보일배와 탁발 순례에 동참했다. 새천년 들어 그가 걸은 거리는 총 2만 리에 달한다.

돌아보니 2001년 이후 두어 차례 지리산을 찾았고 그때마다 이 시인을 만났다. 마지막이 2008년 무렵이었으니 꽤 오랜만이었다. 그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탁발 순례에 나섰다가 큰 탈이 난 것이다. 2009년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1년간 심하게 앓았다. 그런데 순례 후유증이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병상에서 일어나 야생화 사진가로 거듭난 것이다(<경향신문> 2017년 10월10일자 ‘이문재의 시의 마음’ 참조).

‘걷기 열풍’ 불씨 지핀 도보 순례

이원규 시인이 앞장섰다. 그는 ‘걷기의 제왕’이기도 하지만 20년 넘게 모터사이클을 타온 프로 라이더이기도 하다. 시인의 오토바이를 따라 하동에서 구례 쪽으로 달리다 멈췄다. 국도와 함께 가는 섬진강변 옛길. 2001년 5월11일 바로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두어 가지 반찬을 얹은 밥 한 그릇에 국 한 그릇. 양껏 먹되 남기지 말아야 한다. ‘발우공양’과 다르지 않았다.

ⓒ백승기 기자
2001년 도보 순례 코스가 ‘지리산 둘레길’의 모태가 됐다.
이원규 시인(위 사진 왼쪽)은 실상사와 함께 ‘지리산 지킴이’이 구실을 해오고 있다.
맨 위는 섬진강.

밥술을 뜨다 말고 수경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40년 넘게 밥을 먹었는데 아직도 밥 양을 맞추는 게 힘듭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자기 밥 양을 알면 깨우친 거여.” 그때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혼자 무릎을 쳤지만, 안타깝게도 16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내 밥의 양을 가늠하지 못한다. 앎과 함의 사이가 여전히 아득하다.

그해 5월13일, 순례단은 쌍계사에서 출발해 단천골, 의신을 지나 빗점골에 올라 그곳에서 사살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과 토벌대의 넋을 기렸다. 빗점골 초입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길에 이 시인이 도보 순례가 거둔 몇 개의 결실을 환기시켰다. 우선, 이현상 기일을 공식화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몇몇이 남몰래 찾아와 술잔을 기울이고는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시인은 “분단 이후 지리산 외곽을 걸어서 일주한 것도 2001년 봄 우리가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과는 또 있다. 지리산 도보 순례가 걷기 열풍의 불씨 구실을 한 것이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제주올레가 ‘걷기 문화’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지만, 이원규 시인은 지리산 850리 도보 순례가 사실상 첫걸음을 뗐다고 말한다. 도보 순례 이후 이 시인은 지리산 외곽을 두 차례 더 돌아 2005년 둘레길 1구간을 열었다. 하지만 예산 문제 등이 얽혀 중단했다가 2010년 다시 개통됐다.

전남 광양 이원규 시인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16년 전 야영하던 섬진강 백사장에서 지척이었다. 강 건너 하동 읍내가 빤히 보였다. 사진가로 변신한 시인의 집은 작은 갤러리를 겸하고 있었다. 이날 밤, 전해 들은 지리산의 오늘은 심각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생태계가 급변하고 있었다. 선풍기 없이도 여름을 나던 해발 700m 이상 고지 주민들이 이제 에어컨 없이는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사이 개발은 가속화되고 부동산 값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300만원 하던 농가 주택이 6000만원 넘게 치솟았다.

다음 날 아침, 최참판 댁이 올려다보이는 평사리 들판에 잠시 들렀다가 위령제가 열렸던 달궁을 거쳐 서울로 향했다. 옛 기사를 다시 펼쳤다. 그해 봄, 수경 스님이 지리산 위령제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지면이었다. 우선, 민간인 희생자는 물론 빨치산 원혼까지 아우르는 최초의 위령제라는 것, 생명 평화를 화두로 한 위령제를 계기로 종교 간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시민운동이 종교와 손잡으면서 대립 논리를 넘어 상생 논리에 눈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6년이 지난 지금, 위령제에 대한 스님의 의미 부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이념 대립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종교 간 대화도 크게 확대되지 않고 있다. 시민운동이 상생의 가치를 적극 내면화한 것 같지도 않다. 2001년 5월26일 지리산 달궁에서 거행된 위령제 관련 기사는 이렇게 끝난다. ‘지리산 위령제는 끝난 것이 아니다. 달궁을 기점으로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걷는 자가 촛불, 촛불이 언론”

그렇다. 힘의 논리, 경제 논리를 넘어 환대와 상생의 공동체로 가는 길은 여전히 미래다. 도보 순례 역시 2001년 5월18일 실상사에서 끝나지 않았다. 방방곡곡에서 걷기가 붐을 이루고 있지만 ‘더 빨리’를 외치는 속도 지상주의가 여전히 우리 욕망의 고삐를 옥죄고 있다.

지리산에서 돌아와 <시사IN> 창간호를 다시 들춰보았다. ‘위기의 독립언론’이 커버스토리이고 걷기 캠페인이 창간 기념 특별기획이다. 나는 창간호가 매체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데 느리게 걷기와 독립언론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내게는 걷기와 언론이 강력한 메타포로 보인다. 걷기와 언론, 언론과 걷기는 깊이 연결된다.

도보 순례에서 경험했거니와 걷기는 성찰이다. 진지한 성찰은 자기표현으로 이어진다. 나는 ‘자기를 표현하는 주체가 주권자’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가을부터 올봄까지 광장에 모여든 ‘촛불’이 바로 그런 주권자다. 개인이 ‘피부에 갇힌 자아’에서 벗어나 촛불로 거듭났다. 공공성과 정의를 외치는 시민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촛불은 국가와 시장, 현실 정치와 일상생활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다. 촛불을 ‘촛불 이후의 주역’으로 거듭나게 하는 매개 중 하나가 언론이다.

내가 ‘대단히 바쁜 백수’이던 2007년 봄, <시사저널> 사태에 관한 칼럼을 발표한 적이 있다. 나는 편집권 문제로 불거진 갈등의 본질이 민주주의의 위기에 있다고 보았다. 나는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고 간파한 더글러스 러미스를 인용하면서 ‘편집권 없는 언론, 언론 없는 민주주의,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를 상상해보자’라고 썼다(‘창비주간논평’ 2007년 4월3일자).

16년 만에 다시 돌아본 지리산,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펼쳐본 창간호. 내게는 도보 순례와 독립언론이 혈연관계처럼 보였다. ‘걷는 자가 촛불이고, 촛불이 언론’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촛불이 언론을 만들고, 언론이 촛불을 만들어야 한다. 멀리 내다보며 천천히 걷는 독립언론, 질주하는 자본주의에 브레이크를 거는 참언론이 절실한 때다. 남다른 지적이 아니지만, 미래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게다가 미래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문재
원 <시사저널> 창간 멤버. 1989년부터 2005년까지 근무했다(1998~1999년 잠시 문학동네 편집주간으로 가 있었다). 주로 문화부에서 활동했고 말년에 편집위원, 취재총괄부장을 맡았다. 특종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지면을 많이 메우는 데 주력했다. 건축, 도시, 대중문화 등 새로운 기사 장르를 개발하고 몇몇 필자를 발굴하기도 했다. 40대 중반 명예퇴직을 한 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와 시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기사를 쓰기 전부터 시를 써왔다. 틈틈이 시를 발표해 그간 <지금 여기가 맨 앞> <제국호텔> 등 시집 5권과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와 같은 산문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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