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산업 위기를 취재하러 거제에 내려갔다. 렌터카 업체에서 준 지도를 펼쳐보던 이승문 KBS PD(32)의 눈에 문득 한 학교가 들어왔다. 변두리 바닷가 마을에 위치한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무작정 찾아간 이곳에서 운명처럼 이규호 교사와 ‘땐뽀반’ 친구들을 만났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구석진 동네에서, 그것도 도시 전체가 조선산업 위기로 휘청이는 와중에 댄스 스포츠라니. 이승문 PD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처럼 지역사회가 처한 위기를 다른 시각으로 살펴보고 싶다”라며 회사를 설득했다. 절규와 고함 대신, 거제의 풍광과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이 이 지역의 산업 위기, 공동체의 그늘을 더 공감 가게 보여줄 것이라 믿었다.

ⓒ시사IN 조남진

지난 4월에 방영된 KBS 스페셜 〈땐뽀걸즈〉는 그렇게 탄생했다. 시청률은 시원찮았다. 하필 동시간대 경쟁 프로그램이 1차 대선 후보 초청 텔레비전 토론이었다. 시청자 게시판이 폭발하는 일은 없었지만, SNS상에서 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점차 화제를 모았다. 캐릭터의 힘이 입소문을 불렀다. 승진도 포기한 채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게 하고, 잘 가르쳐서 사회에 내보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는 교사, 조선소에서 희망퇴직을 한 아빠와 떨어져 지내는 단장,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스텝을 연습하는 친구. 눈앞에 직면한 구조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전국 대회를 준비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공감을 얻었다.

방송 직후 영화사에서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울지마 톤즈〉처럼 방송이 화제를 모아 스크린으로 이어진 적은 있지만, 〈땐뽀걸즈〉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러브콜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9월27일 개봉한 극장판 〈땐뽀걸즈〉는 다큐멘터리의 특징인 내레이션, 인터뷰 컷을 최대한 덜어내고 주인공인 아이들의 시점에 집중했다. 상영 분량도 85분으로 늘렸다.

영화는 개봉했는데, 감독은 파업 중이다. 이승문 PD 역시 ‘KBS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5년 전 ‘리셋 KBS’ 파업에서는 공채 막내 기수 대표였지만, 이번에는 ‘기록’을 맡았다. 〈땐뽀걸즈〉에서 손발을 맞춘 김훈식 카메라 감독과 함께 내·외부자의 시선을 넘나들며 파업 현장을 담는다. 이승문 PD는 “공영방송이 무너지면서 PD 조직이 점차 관료화되었다. 경직된 조직 분위기 때문에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거나 함께 협업하는 문화도 퇴색되었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새로운 제안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땐뽀걸즈〉 같은 시도가 더 활발하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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