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 천막을 걷어내자 두어 평 남짓 평상이 휑하니 드러난다. 이중 삼중으로 깔려 있던 돗자리 바닥 아래 플라스틱 지지대 사이엔 여름휴가철 해변처럼 쓰레기가 나뒹군다. 스티로폼 조각, 캔 음료, 빵 비닐들, 그리고 딱딱하고 거무튀튀한 고양이 똥이 발견됐다.

“이게 주범이었어!”

삼성 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농성장. 709일 만에 대청소를 유발한 주된 요인은 고양이(배설물)다. 농성장을 드나들던 고양이 서너 마리가 좁은 틈으로 들어가 볼일을 보는 바람에 쿰쿰한 냄새가 진동했다고. 찬바람도 불어오니 월동 준비 겸 대대적인 리모델링 계획을 세웠다. 반올림 활동가 공유정옥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대청소 공지를 보고 나는 슬그머니 출동했다.

 

ⓒ시사IN 이명익

 


“의사란 이름을 떠난 지 5년쯤 됐어요.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 ‘의사’에 방점이 찍혀 나가요. 그냥 전문의 자격증 따고 살고 싶은 대로 살 뿐인데….”

 

 

 

 

7년 전 인터뷰이로 만난 공유정옥씨가 말했다. 살고 싶은 삶을 이어가던 그는 요즘엔 반상근 활동가로 일하며 직장에 나간다. 얼마 전 공저로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이란 책을 냈다. 13명의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와 연구원이 쓴 ‘일하다가 죽는 사회에 맞서는 직업병 추적기’다. 진즉에 사둔 책을 강남역 가는 버스에서 폈다.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면, 산재 신청을 포기하면 10억원을 주겠다는 삼성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7년 만에 공식 산재 인정을 받아내지 못했다면, 우린 지금까지도 반도체 및 첨단 전자산업의 위험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178쪽).”

농성장에 도착하니 책 속의 황상기씨가 예의 염화미소를 머금은 채 묵은 짐을 바삐 나른다. 그 옆엔 또 다른 ‘유미’, 한혜경씨가 있다. 열아홉 나이에 삼성전자 LCD사업부에 들어가 일한 지 3년 만에 월경이 완전히 멈췄고 뇌종양이 발병했다. “설마 삼성처럼 큰 회사가 몸에 해로운 일을 그냥 시키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177쪽)”던 그녀는 지금 휠체어에 앉아 있고, 어머니 김시녀씨는 두 팔 걷어붙이고 현장을 지휘한다.

 

 

 

“유미 아빠, 이건 버립시다.” “김 반장이 버리라면 버려야 돼! 하하.” 삼성에서 일하다가 죽거나 골병든 자식을 둔 부모들, 무심하고 일상적인 저 말들이 정겹고 아프다. 마스크를 쓰시라고 해도 답답하다며 맨몸으로 먼지 구덩이 속을 누비는 것까지 닮았다. 저토록 성실함으로 나날을 통과해 이른 곳이 맨바닥, 남의 목숨과 고통을 연료로 몸집을 불려나가다 괴물처럼 비대해져버린 저들의 목전이다.

나는 세간 정리를 맡았다. 농성장 둘레 선반에 쌓아두었던 냄비며 접시, 일회용 커피, 공구세트, 문구용품, 스탠드, 화분 등을 꺼내 먼지를 닦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한 젊은 남자가 성급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말을 건다.

기업은 꿈쩍 않지만 사람은 흔들린다
 

“이제 끝났습니까? 잘 해결된 건가요?” 그건 아니고 대청소 중이라고 말했더니 낙담한다. 출근할 때마다 버스 타고 농성장 앞을 매일 지나간다고 했다. 차창 밖으로 농성장이 해체된 걸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목적지도 아닌데 내려서 일부러 찾아왔다며 머뭇거리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기업은 꿈쩍 않지만 사람은 흔들린다. 공유정옥씨가 어느 노동자의 죽음에 흔들렸듯이 노동자의 질병을 직업병으로, 즉 “인간 노동력의 결함이 아닌 노동과 자본-기계와의 결합 관계의 문제(328쪽)”로 밝혀낸 여러 의사가 있고, 공장 안의 위험한 비밀을 굴뚝 바깥으로 나와서 알리는 노동자들이 있고, 또 타인의 죽음에 눈길을 거두지 않다가 다급하게 안부를 묻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 가을날 더 많은 것들이 흔들리길. 그 흔들림의 결합만이 이 농성장의 소멸을 가능케 하리라. 인정 없는 노동의 풍경을 바꿔내리라.

 

기자명 은유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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