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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처럼 보인다 그런데 ‘증거’가 없다

제러미 밤버는 영국에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는 죄수 가운데 유죄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법적 다툼을 계속하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0월 12일 목요일 제5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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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8월7일 아침 7시께, 경찰은 날이 밝기를 기다린 끝에 뒷문을 부수고 화이트 하우스 농장으로 진입했다. 그날 새벽, 농장 주인의 아들 제러미 밤버한테 신고 전화를 받았다. 제러미는 아버지 네빌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누나인 쉴라가 장총을 들고 미쳐 날뛴다는 것이었다.

ⓒMirror 갈무리
1985년 9월8일 제러미 밤버는 양부모 등 다섯 명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Mirror 갈무리
2016년의 제러미 밤버 모습.

농장에 진입한 경찰은 시신 다섯 구를 발견했다. 네빌 밤버 부부와 그들의 딸 쉴라 카펠, 쉴라의 아이 둘이었다. 사망한 순서는 알 수 없었다. 61세인 네빌은 1층 부엌에 쓰러져 있었다. 잠옷을 입고 있었다. 총알 여덟 발을 맞은 상태였다. 여섯 발은 목과 얼굴에 맞았다. 매우 가까이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보였다. 결정적인 총격은 머리에 가해진 두 발이었다. 식기가 깨지고 의자들이 엎어져 있었다. 심한 몸싸움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네빌의 아내 준은 2층 침실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역시 잠옷을 입고 있었고, 피가 흘러내린 모양으로 보아 총을 맞던 도중 일어나 앉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총알 일곱 발을 맞고, 그중 한 발은 미간 정중앙에 꽂혔는데, 30㎝ 이내의 거리에서 가한 총격이었다. 여섯 살짜리 쌍둥이 아이들은 자기들 방 침대에서 죽어 있었다. 한 아이는 뒤통수에 다섯 발의 총알을 맞았다. 다른 아이는 세 발을 맞았다. 매우 근거리에서 쏜 총알이었다. 자다가 총에 맞은 듯, 아이들의 침대는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

ⓒMirror 갈무리
사건 현장은 어수선했다.

스물여덟 살인 쉴라는 어머니 옆에 누워 있었다. 역시 잠옷 바람이었고 맨발이었다. 두 발은 턱에, 한 발은 목에 맞았다. 10㎝ 이내의 거리에서 쏜 것이거나 몸에 대고 쏜 총격이었다. 앉은 상태에서 총에 맞은 것으로 보였다. 혈액 및 소변검사 결과 쉴라는 향정신병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마초도 피운 상태였다. 펼쳐진 성경이 그녀 옆에 있었다.

사건은 명백해 보였다. 쉴라가 부모와 자기 아이들을 죽인 다음 스스로 총을 쏴 죽은 것이다. 쉴라는 오랜 기간 정신분열증을 앓아왔다. 헤어진 남편은 아이들을 자기가 맡아 키우는 게 낫다고 했다. 가족들은 그 전날, 쉴라의 아이들을 낮에는 다른 사람에게 돌보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논을 했다고,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러미 밤버가 진술했다.

제러미와 쉴라는 네빌과 준의 친자식이 아니었다. 네빌 밤버는 공군 비행사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살아 돌아와 1946년 동갑내기인 준과 결혼했다. 젊은 부부는 에식스에 있는 300에이커(약 36만 평)에 달하는 농장에서 살림을 시작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부부는 1958년 생후 2주의 쉴라를, 3년 뒤인 1961년 6주 된 제러미를 입양했다.

ⓒAnglia Press Agency
ⓒAnglia Press Agency
1985년 8월7일 아침, 범죄의 피해자가 된 쉴라(위 사진 가운데)와 두 아들(아래 사진).
양부모인 네빌과 준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네빌과 준은 입양한 아이들을 외형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이 키웠다. 네빌은 지역의 치안판사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비싼 사립학교 및 기숙학교에 다녔다. 아이들과 양부모의 감정적 유대는 그리 강하지 않았던 듯하다. 특히 준은 뒤늦은 어머니 역할에 그리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종교에 열렬히 빠져들었다.

아들 제러미는 빼어난 외모에도 불구하고 호감을 사기보다는 어딘지 기분 나쁘게 하는 데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농장 주변의 동물들을 못살게 굴었고 사람들의 신경을 긁기 일쑤였다. 농장의 오랜 일꾼은 어린 제러미가 자기는 고용주가 될 것이고 당신은 그저 일꾼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제러미는 남자 기숙학교에서 상급생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양부모의 돈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여행을 떠났으나 마약에 손을 대고 절도를 저지르기도 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제러미는 농장 근처 양부모 소유의 작은 집에 살면서 농장 일을 돕기 시작했다. 농장에서 차로는 5분, 자전거로는 15분 떨어진 거리였다.

초반에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쉴라의 불행한 삶


제러미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아예 무시하는 타입이었다면, 쉴라는 끊임없이 양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쪽이었다. 쉴라는 중등교육을 마치고 비서 학교로 진학했으나 열일곱 살에 임신했다. 아이의 아버지인 콜린 카펠은 결혼을 원했으나 쉴라의 어머니 준은 낙태를 종용했다. 이 임신이 가족 관계에 준 충격은 컸다. 준은 혼전 성교는 심각한 죄악이라고 쉴라를 심하게 다그친 후 그녀를 ‘악마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쉴라는 밤비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모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 모델 경력은 다시 콜린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끝장이 났다. 쉴라는 결국 콜린과 결혼했다. 양부모는 그들을 위해서 런던에 집을 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산을 했고, 다시 임신을 했지만 또 유산을 했다. 그녀는 또다시 임신을 했고, 콜린은 다른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쉴라가 남자 쌍둥이를 낳은 지 다섯 달 만에 콜린은 쉴라를 떠나갔다.

쉴라는 급격히 불안정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약을 하고, 남자들과 파티에서 만나는 생활을 계속하다가, 결국 정신분열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세월을 보냈다. 또한 자기 아이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준이 자기를 부른 그대로였다. 어머니 준과의 관계 역시 악화일로였다. 점점 더 깊이 종교에 귀의하게 된 준은 쉴라의 어린 아들들에게도 종교 생활을 강요했다.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버지 콜린은 이를 매우 싫어했다.

1985년 8월4일, 쉴라는 쌍둥이를 데리고 주말을 보내기 위해 화이트 하우스 농장에 왔다. 농장 일꾼들 말로는 쉴라는 행복해 보였다고 했다. 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면 아이들이 발견된 방, 즉 쉴라가 어릴 때 쓰던 방의 찬장에 누군가 “나는 이곳이 싫어”라고 칼로 새겨놓은 것이 남아 있다. 제러미는 8월6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농장에 왔다. 가족은 아이들 맡기는 문제를 논의했고, 제러미는 밤 9시30분께 농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다음 날 새벽, 참극이 발생한 것이다. 언론은 사건을 떠들썩하게 다뤘다. ‘미모의 전직 모델이 미쳐서 양부모와 자기 아이들을 죽여버리고 자살했다.’ 이보다 더 자극적인 사건이 어디 흔하겠는가.

일주일 후 치러진 장례식에서 제러미는 매우 슬퍼 보였고 애인인 줄리 머그퍼드의 어깨에 기대 울며 비틀거렸다. 몇몇 사람은 그가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제러미의 사촌은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슬퍼 보였던 그가 의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멀어지자 활짝 웃었다고 했다. 제러미가 계단을 펄쩍 뛰어 내려가더니 “이제 내가 대장이야”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장례식을 마친 후 제러미는 양부모의 차를 팔아치우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대중지에 쉴라의 나체 사진을 팔겠다는 제의를 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도 슬프지 않은 사람 같았다.

ⓒAnglia Press Agency
장례식에 참석한 제러미 밤버(오른쪽)와 그의 애인 줄리 머그퍼드.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후, 줄리는 증언을 바꾸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9월7일, 제러미의 애인 줄리가 경찰에 찾아가 새로운 진술을 했다. 애초 줄리는 제러미의 주장, 즉 8월7일 새벽 3시30분쯤 줄리에게 전화를 걸어 농장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는 진술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제러미가 사실은 양부모를 매우 미워했고 죽이고 싶어 했으며, ‘미친’ 누나 역시 제거하고 싶어 했다고 주장했다. 부모가 누나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했고, 부모를 살해해도 쉴라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네빌의 유언장에 따르면 유산은 제러미와 쉴라가 나누어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가 여러 가지 살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이야기하는 동안 줄리는 그저 헛소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8월6일 밤은 달랐다. 농장에서 돌아온 이후 제러미는 전화로 “오늘 밤이 아니면 영영 못해”라고 말했다고 줄리는 주장했다. 그에 앞선 주말 제러미의 집에서 묵었던 줄리는 제러미가 양어머니의 자전거를 빌려다놓은 것을 보았다. 그러니 제러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자전거를 타고 농장에 가서, 창문을 따고 들어가 가족을 모두 죽일 수 있었다는 게 줄리의 주장이었다. 그러고 나서 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줄리는 제러미가 전화로 “다 잘 될 거야. 농장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어. 한잠도 못 잤어”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와 같은 줄리의 진술로 인해 제러미는 9월8일 체포되었다. 물론 제러미는 이를 부인했다. 자신에게 차인 줄리가 앙갚음을 하고 있다는 게 제러미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장례식 이후 계속 싸웠다. 제러미는 다른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줄리가 새로운 진술을 하기 직전에도 심하게 다퉜다. 줄리는 거울을 깼고, 제러미는 줄리의 팔을 비틀었다. 며칠 후 줄리가 경찰을 찾아간 것이다. 사건 직후 왜 이렇게 진술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줄리는 그 전에 저지른 자신의 범죄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줄리는 친구의 수표책을 몰래 사용했고, 대마초를 팔았으며, 제러미가 양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돈을 훔치는 것을 도왔다. 검찰은 제러미 사건에 협조하는 대가로 줄리의 범죄들을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 제러미는 9월29일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검찰은 제러미가 과연 네빌한테 전화를 받았는지부터 의심했다. 네빌이 목에 입은 총상으로 보아 통화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또한 농장 부엌의 전화기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제러미는 8월7일 새벽 3시30분쯤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검찰은 그가 경찰 출동을 늦추기 위해 일부러 999(응급전화)가 아니라 지역 경찰서에 신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999든 경찰서든 출동하는 시간에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증거는 소음기였다. 애초 현장에서 발견된 장총에는 소음기가 붙어 있지 않았다. 소음기는 1층의 총기 진열장에서 발견되었고 안쪽에 피가 묻어 있었다. 피는 쉴라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쉴라의 팔 길이로 보았을 때 소음기가 총에 연결되어 있었다면 쉴라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또한 소음기에는 부엌 선반의 페인트가 묻어 있었다. 소음기가 총에 달린 채로 몸싸움이 벌어져 선반에 부딪쳤다는 증거로 볼 수 있었다. 쉴라가 네빌과 몸싸움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네빌은 키가 190㎝가 넘고 건강하고 힘이 셌다. 더구나 쉴라의 시신에는 드잡이를 한 흔적이 없었다.

ⓒMirror 갈무리
식기가 깨지고 의자들이 엎어져 있었다. 심한 몸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음기가 진열장에서 발견된 경위도 명백하지 않았다. 사건 직후 총기 진열장을 수색했을 때 경찰은 소음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제러미의 사촌들이 소음기를 발견했다. 사건 발생 사흘 뒤의 일이었다. 제러미가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네빌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는 쪽이 바로 그 사촌들이었다.

배심원들은 10대2로 살인을 평결했지만…

애초 경찰은 사건을 정신이 불안정했던 쉴라의 범행으로 단정했다. 조사는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문 감식도 혈액검사도 없었고, 현장 사진 역시 시간이 지난 후 찍었다. 현장은 마구 훼손되었다. 아이들의 시신은 매장되었지만 네빌과 준과 쉴라의 시신은 화장되었다. 증거는 제대로 보존되거나 제출되지 않았고, 경찰의 신고 접수 기록에도 모순이 있었다.

줄리는 검찰 측 증인으로 재판에 출석해 증언했다. 줄리의 진술이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제러미는 1986년 가을, 다섯 건의 살인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배심원들은 10대2로 살인을 평결했다. 유죄판결에 필요한 정족수를 간신히 맞춘 것이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스물네 살이었다. 줄리는 유죄 선고가 나자마자 거액의 돈을 받고 신문에 경험담을 팔았다.

제러미는 1991년 죽을 때까지 석방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죄를 인정한 적이 없고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영국에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는 죄수들 중 유죄를 인정하지 않은 이는 제러미 한 명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이렇게 스스로 무죄라고 믿는 것 자체가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증상이라고 말한다. 탐욕에 눈이 멀어서 양부모뿐 아니라 어린이들까지 잔인하고 냉정하게 죽인 사이코패스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무죄이며 석방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먼저, 이 사건의 진범은 그가 아닌 쉴라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누가 진범이냐의 논의와 무관하게 수사와 재판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가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고, 그 정도의 정황증거만으로는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나타난 여러 증거 중 제러미가 가족들을 ‘죽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자백도 없었다. 여러 사정을 종합해볼 때 제러미는 살인범처럼 ‘보였다’. 그리고 제러미가 가족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직접적인 증거도 없었다. 그는 신뢰할 수 없고 동정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가족들의 죽음을 통해 명백히 이득을 볼 사람으로 보였다. 그것만으로 그가 가족들을 죽였다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살인범이라고 단죄하고 평생을 가두어두고자 한다면 적어도 이보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제러미는 포기하지 않고 지지자들과 함께 법적 다툼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무죄를 증명해줄 새로운 증거에 100만 파운드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 돈은 물론 그 증거로 인해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 재산을 되찾고 나서야 마련될 것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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