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한 매체는 경제 전문지 〈인사이드 USA 트레이드(Inside USA Trade)〉였다(9월1일). 이 매체는 “빠르면 다음주(9월3~9일)”라고 시기까지 박았다.

느닷없는 일은 전혀 아니었다. 트럼프는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2012년 발효된 한·미 FTA에 대해 “일자리 10만 개를 사라지게 한 재앙, 힐러리 클린턴이 만든 끔찍한 협정”이라고 불렀다. 트럼프 집권 이후부터 미국 행정부에서는 “한·미 FTA의 불공정성” 관련 언급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지난 4월에는 한국을 방문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한·미 FTA 개선을 추진하겠다”라고 엄포를 놓고 돌아갔다. 이렇게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주무부서인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나섰다. 지난 7월13일, 공식 트위터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한·미 FTA 발효 이후 5년 동안,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재화 부문 무역적자(goods trade deficit)’가 132억 달러(2011년)에서 276억 달러(2016년)로 2배 이상 늘어났다. 반면 미국의 한국에 대한 수출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는 전임 오바마 행정부가 한·미 FTA에 대한 미국 시민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전해온 바와 크게 다르다. 우리는 더 잘할 수 있고 더 잘해야 한다.” USTR은 이른바 ‘공동위원회 특별회기(Special Joint Committee Meeting)’를 한국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협정 조항의 수정과 변경을 위한 회의였다.

하지만 지난 8월22일 서울에서 열린 특별회기에서 한·미 양국은 어떤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 의견 차이가 심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9월2일)에 따르면, 미국은 ‘전체적인 재협상(wholesale renegotiation)’을 원했다. 심지어 쇠고기와 주요 곡물 등 2026년까지 순차적으로 무관세 전환되는 모든 미국 농산품에 대한 관세를 당장 폐지하라는 요구까지 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측은 ‘사소한 손질(minor adjustments)’만 가능하다고 맞섰다. 한국을 첫 제물로 일본·멕시코 등 대미(對美) 무역 흑자국들에 압박을 강화하려 했던 백악관의 매파들이 격노했다.

자유무역협정은 한쪽이 원한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허술한 계약이 아니다. 당사국 정부 사이 수년에 걸쳐 논의한 다음 겨우 타결해도 각국 의회의 비준을 받아내야 발효되는 ‘국제조약’이다. 법적 지위도 매우 높다. 해외 일부에서는 국내법인 헌법보다 상위법으로 간주할 정도다. 그런데도 글로벌 패권국가라는 미국의 대통령이 끊임없이 ‘불공정’ 운운하며 툴툴대고 행정부 주요 인사들까지 나서 앙탈을 부린 끝에 ‘협정 전체를 뒤엎자’고 요구해온 것이다. 그것도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전쟁 공포에 질린 동맹국에게 말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앙탈이 합리적 수준을 넘어섰다는 정황은 한국 내부의 반응에서 드러난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미국 측이 얼마나 억울하면 저럴까’ ‘한·미 FTA가 한국에 엄청 유리한 조약인 것 같다’ 따위 일종의 ‘동정 여론’이 조성되었다. 심지어 ‘트럼프 행정부의 시도는, 지난 정부의 한국 대표단이 FTA 협상을 엄청나게 잘했다는 증거’라는 반응까지 나온다.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아 한·미 FTA 타결을 이끌었던 김현종씨가 이번에도 같은 직위에 임명된 것은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8월22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서 양국 수석대표인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영상회의를 하고 있다.

한·미 FTA는 정말 한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협정일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재화 부문 무역적자’가 한·미 FTA 발효 이후 5년 동안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는 USTR의 주장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재화 수출액은 FTA 발효 직전인 2011년부터 발효 5년 뒤인 2016년 사이에 매년 410억~430억 달러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한국의 대미 수출액은 2011년의 567억 달러에서 2016년에는 699억 달러로 100억 달러 이상 늘어났다. 같은 기간 대미 무역흑자도 132억 달러에서 276억 달러(2016년)로 증가했다. 이런 외형적 수치만으로 협정의 불공정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무역흑자를 낸다고 해서 그 나라의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의 한국 경제가 표본적 사례다.

어떤 나라든 경기가 호전되면 소비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국내 제품뿐 아니라 해외 제품에 대한 소비, 즉 ‘수입’도 함께 늘어난다. 반대로 불황기에는 소비가 줄어들면서 ‘수입’ 역시 감소하는 추세가 나타난다. 한·미 FTA가 체결된 2012년부터 2016년 사이, 한국의 총 수출액과 수입액은 동반 하락했다.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총수출액(미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무역 상대국에 대한 수출액)은 2011년 5552억 달러에서 2016년 4954억 달러로 598억 달러 줄었다. 수출보다 수입의 감소폭이 훨씬 크다. 한국의 총수입액은 2011년에 5244억 달러였는데 2016년에는 4062억 달러로 1182억 달러나 떨어졌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허리띠를 졸라맨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무역흑자는, 불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수출보다 수입이 훨씬 더 줄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한국의 총수입액이 줄다 보니 미국산 재화도, 트럼프가 만족할 정도로 구입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의 2016년 총수입액(미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무역 상대국으로부터 수입한 상품의 액수)이 2011년에 비하면 22.5%나 격감한 반면 대미 수입액은 2.8%밖에 줄지 않았다. 미국이야말로 한·미 FTA 덕분에 한국에 대한 수출(한국 처지에서는 미국으로부터 수입)이 덜 줄어든 것으로 봐야 한다.

대미 수출 늘어난 게 한·미 FTA 덕분?

물론 한국 역시 총수출이 하락하는 가운데서 대미 수출만은 늘었다. 이 또한 전적으로 한·미 FTA 덕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부 품목에서는 단계적 관세 인하에 따라 미국이 최근 들어서야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기도 했다.

한국무역협회 통계시스템(K-stat)에 따르면, 한국은 한·미 FTA 발효 이후 5년(2012~2016년) 동안 미국에 모두 3272억 달러 규모의 재화를 수출했다(왼쪽 표 참조). 수출액 기준으로, 상위 5대 품목(MTI 4단위 분류로 승용차, 자동차부품, 무선전화기, 집적회로반도체, 제트유 및 등유)의 5년간 수출액을 모두 합치면 1553억 달러로 전체 대미 수출의 47.5%에 달한다. 이 가운데 한·미 FTA의 확실한 수혜 품목은 ‘제트유 및 등유(109억 달러)’다. 무선전화기(297억 달러)와 집적회로반도체(115억 달러)는 이미 1997년부터 WTO 규정에 따라 무관세로 미국에 수출해왔으므로 한·미 FTA와 관계없는 품목이다.

결국 문제는 승용차(699억 달러)다. 한·미 FTA 이전에 한국은 미국산 수입 승용차에 대해 8% 관세를 물렸다. 협정에 따라, 미국산 승용차에 대한 관세는 발효(2012년 3월) 즉시 4%로 내린 뒤 2016년 1월부터 철폐되었다. 이에 비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한국산 승용차는 한·미 FTA 이전엔 2.5%의 관세를 부과받았다. 발효 이후에도 2015년까지 2.5%의 관세를 그대로 유지하다가 2016년 들어 무관세로 전환되었다. 결국 지난해부터 한·미 양국 간 자동차 수출입 시장에서 관세 부문의 교역 조건이 동등해진 것이다.

지난 5년 동안의 실적만으로 교역 조건의 유불리를 단정할 수는 없다. 미국의 자동차 생산자들로서는 지금부터가 한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인다. 2015년 174억 달러였던 한국의 대미 승용차 수출액은 관세가 철폐된 2016년에 오히려 155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이에 비해 미국의 대한(對韓) 승용차 수출액은 2015년의 12억 달러에서 다음해에는 17억 달러로 증가했다. 같은 시기 한국의 독일 승용차 수입액은 각각 59억 달러(2015년), 48억 달러(2016년)였다. 수입차 시장에서 미국 차량의 점유율이 상승한 반면 독일 차량의 점유율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멀찌감치 따돌렸다. 물론 여전히 독일 승용차의 점유율이 훨씬 높지만, 이는 미국 생산자들이 차량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높여 해결하는 쪽이 ‘시장의 순리’이며, 한·미 FTA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연합뉴스2016년 한국의 대미 승용차 수출액은 155억 달러로 전년에 비해 19억 달러 줄어들었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는 오직 ‘재화 부문’에서 발생하는 무역적자만 탓하고 있다. 무역수지의 양대 축 가운데 다른 하나인 ‘서비스 무역’에 대한 언급은 피한다. 당초 미국이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서비스 시장 개방이었다. 이후 미국의 지식재산에 대한 보호도 크게 강화되었다. 서비스 부문에서 미국의 대한 무역흑자는, 2011년의 110억 달러에서 2016년엔 143억 달러로 30%나 증가했다(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미국은 재화 부문의 무역에서 적자를 보는 반면 서비스 부문에서는 흑자를 계속 늘려나가고 있다. 한국에서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금융·의료 등)의 육성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부문의 최강국인 미국의 대(對)한국 서비스 수출은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한국의 서비스 산업이 미국에 시장을 열어놓은 상황에서 자체적인 경쟁력을 강화해나갈 수 있을지 우려될 정도다.

올해 들어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한·미 FTA를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협상하는 것이 갈수록 불합리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상반기(1~6월), 미국에 343억5000만 달러 규모의 상품을 수출하면서 131억5000만 달러에 이르는 무역흑자를 기록했다(수입은 212억 달러). 올해 상반기의 대미 수출은 340억 달러 규모로 지난해와 비슷하지만 수입이 260억 달러로 급등하면서 무역흑자 역시 80억 달러에 그쳤다. 지난해 상반기 대비 39.2%나 감소한 수치다.

계속되는 트럼프의 한·미 FTA 개편 시도

〈인사이드 USA 트레이드〉는 9월6일, 트럼프 행정부가 “한·미 FTA 폐지 문제를 당분간 거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라고 보도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정치권과 산업계에서도 “한·미 FTA 폐지가 미국의 국익에 이롭지 않다”라는 여론이 거세게 제기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9월3일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한반도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국을 압박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을 터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결코 한·미 FTA의 대대적 개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난 6월 말, 한·미 정상회담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국이 한반도 문제의 운전석에 앉는다”라는 수사를 ‘허용’하는 대신 한·미 FTA 재협상을 제기했다.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을 발사한 직후인 8월 초, 문재인 대통령이 전화통화로 “한국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을 용인할 수 없다”라고 호소하자 다시 한·미 FTA 개정을 요구했다.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과 북한의 반격으로 전화(戰禍)에 휩싸일지도 모를 동맹국의 약점을 잡아챈 끈덕진 협박 행위다. 이런 시도가 8월22일 특별회기에서 좌절되자 “폐기 검토”라는 ‘벼랑 끝 전술’로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미국 국제전략연구소(CSIS)의 아시아 전문가인 마이클 그린은 9월2일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핵·미사일 위기 와중에 한·미 FTA 폐기를 검토한다는 사실 자체가 경악스럽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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