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격이 이벤트화(event化)되거나 스펙터클화(spectacle化)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 한 사람이나 집단이 사건화되거나 구경거리가 되고 나면, 대중은 더 이상 그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 전 국민의 이목을 끄는 사건이나 구경거리가 되면서 한 사람 또는 특정 집단은 어떤 새로운 해석이나 해명에도 끄떡하지 않는 영구불변한 기호가 된다. 김부선은 ‘대마초녀’, 김용민은 ‘막말꾼’, 이석기는 ‘빨갱이’, 동성애자들은 ‘항문으로 하는 놈들’이고, 9월5일 타계한 마광수는 ‘색마’였다.

ⓒ이지영 그림

물론 기호가 되는 것에 부정적인 함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스미디어가 범람하고 자기 홍보가 대세인 시대에 우리는 기호를 얻기 위해 만인과 쟁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를 획득해야 주목받고 비로소 자신을 팔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앞서 열거한 것과 같은 부정적인 기호는 폭락한 주식과 같다. 〈즐거운 사라〉 사건 이후 마광수는 꾸준히 신간을 냈으나 독자 대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구속 사건은 독자로 하여금 마광수를 ‘안 읽어도 뻔히 아는 작가’로 만들어놓았다. ‘색마는 포르노 소설을 쓰죠!’


인격이 이벤트화한 사람은 더는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사람, 새로운 이해를 구할 수 없는 사람, 곧 살아 있는 시체가 된다. 마광수쯤은 안 읽어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이름난 문학평론가도 수두룩하다. 예컨대 그가 타계한 직후, 장석주는 어느 일간지의 추도문에 이렇게 썼다. “그는 〈소돔 120일〉을 쓴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이고, 〈눈 이야기〉를 쓴 조르쥬 바타이유였다.” 고인을 추앙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광수는 페티시즘 성향이 강한 이성애 범성욕주의자였지, 스너프 필름(Snuff Film)처럼 생명을 파괴했던 사드나 바타이유의 시체애호증적 일탈 성욕과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다. 〈성애론〉(해냄, 1997)을 비롯한 무수한 에세이에서 마광수는 자신의 사도마조히즘을 “척”하기 또는 “게임”으로 풀이했다. 그는 가학적 고문이나 살인 등을 연상시키는 사드와 자신을 명백하게 구분하면서, “달콤한 탐미성에 바탕을 두고 관능적인 상상력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사도마조히즘이 바로 내가 바라는 사도마조히즘”이라고 밝혔다. 그의 사도마조히즘은 성애의 기쁨을 배가하기 위해 고안된 중국과 인도의 방중술에서 기원하고, 사드나 바타이유의 그것은 독신(瀆神)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되찾는 게 목적이다.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
한흥섭 지음
사문난적 펴냄
〈즐거운 사라〉의 작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은 수사를 지휘했던 심재륜·김진태 검사도, 음란물이라는 감정을 해준 문학평론가 이태동과 법학자 안경환도, 수사를 의뢰한 손봉호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 이사장도, 문학계를 대표해 유권해석을 내려준 이문열도 아니다. 기껏해야 이들은 인격 살상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으며, 이처럼 작은 그림으로는 필화 사건의 커다란 배후를 그릴 수 없다. 주범을 찾으려면 한흥섭의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사문난적, 2011)를 펼쳐야 한다.

공자(기원전 551~479)가 직접 편찬했다는 〈시경〉은 중국 문학의 비조이자 유가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그러므로 〈시경〉은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유교 국가였던 한국 문학의 시조도 된다. 공자는 자신이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노래 3000여 편 가운데 305편을 가려 뽑은 다음, 자신의 제자들에게 덕을 지닌 군자가 되려면 이 노래들을 듣고 외워서 그것을 온전히 몸으로 체득하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문제는 성현이 고른 ‘시삼백(詩三百)’ 가운데 꽤 많은 시가 청춘 남녀나 기혼 남녀의 사랑 또는 불륜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노골적인 성애와 남매간의 근친상간이 묘사된 것도 있고, 남창이 화자로 등장하는 시도 있다. 어쩌자고 공자는 이처럼 추잡스러운 ‘음분시(淫奔詩)’를 버리지 않고 취했을까.

야차들은 타인의 불운을 지나치지 않는다

초기 유학자들은 성현이 편찬한 다수의 노래 가운데 음란한 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305편의 시마다 짤막한 주석을 달며 결혼한 부부관계에서 벗어난 모든 형태의 연정을 제3자가 당시 군주나 세상 풍속을 완곡히 풍자하는 풍자시로 해석했다. 이들은 〈시경〉에 나오는 남녀 사이의 정감 또는 욕망을 인간 고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런 정감이나 욕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풍자를 통해 추방되거나 부정되어야 했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근엄한 경전에 음란과 불륜이 묘사된 시가 있다고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 유학의 완성자인 주자(기원전 1130~1200)다. 그는 〈시집전(詩集傳)〉이라는 〈시경〉 해설집을 쓰면서 무려 30여 편에 이르는 시를 음분시로 단정 지었다. 그러면서 성현이 경전에 음분시를 넣은 연유를 “아주 좋은 시뿐만 아니라 아주 나쁜 시도 성정의 올바름을 얻도록 하는 데 쓸모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흥섭은 주자보다 19편 더 많은 49수를 음분시로 간주하고 재해석을 하면서, 공자의 시관(詩觀)과 색관(色觀:성애관)은 ‘거짓 없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성정을 인정하는 것이었다고 반박한다. 공자 사후 1000년 이상 전해 내려온 초기 유학자의 주석이나, 그 후로 700년 동안 동아시아의 문학사를 장악하게 되는 주자의 〈시집전〉은 모두 문학을 백성 교화의 수단으로 보았다. 21세기를 눈앞에 놓고도 한국인의 뇌리 속에서는 유교적 이상국가에 봉사했던 전통적인 문학관이 사라지지 않았고, 바로 이것이 마광수를 처단하게 된 근본 배경이다.

〈즐거운 사라〉와 같은 필화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국 문인들은 꿩 먹고 알 먹는 잔치를 벌인다. ‘마광수의 소설은 쓰레기다, 그러나 그를 감옥에 보내는 것은 반대다.’ 이들은 이런 기회에 자신의 높은 문학적 감식안도 뽐내고, 헌법이 보장한 보편적 가치의 수호자도 되고 싶어 한다. 어떤 결벽과 어떤 강박이 당신들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도록 시켰는가. 쉼표(,) 앞의 전제는 항상 도움이 필요한 작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예컨대 ‘최영미의 시는 상업적이다, 그러나 그녀가 A호텔에 했던 제안 때문에 조리돌림을 당하는 것으로부터는 지켜주고 싶다’라는 발언은 이미 그녀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신이 발언한 그 자리는 최영미의 문학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야차(夜叉)들은 자신의 균형 감각을 전시할 수 있는 타인의 불운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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