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가을 즈음, 나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고, 그는 막 주류 가요계에 데뷔한 신인이었다. 나에게는 전에 없던 1개월 정도의 자유 시간이 주어진 상황. 그때 나는 이 신인의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그의 이름은 서태지(와 아이들), 곡의 제목은 ‘난 알아요’였다.
9월2일. 서태지는 데뷔 25주년 기념 공연을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했다. 관중이 몰렸고, 함성이 울렸다. 예매에 성공한 나 역시 부푼 가슴을 안고 있었다. 그가 무대의 레퍼토리 중 일부를 ‘원곡과 같은 연주와 춤’으로 들려주고 보여주겠다고 공언한 이유가 컸다.
“그렇다면 양현석, 이주노 파트는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궁금증은 곧 풀렸다. 그는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과 함께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대표곡들을 쉴 새 없이 들려줬다. 철저한 고증을 통한 재현이 무엇보다 빛을 발한 라이브였다. 게다가 이 공연은 그가 정말 오랜만에 무대에 선 것이기도 했다. 그간의 기다림을 해갈해주고, 또 해갈하고 싶다는 욕망이 공연장을 뒤덮었다. 히트곡을 총망라한 공연 목록 역시 팬들에 대한 배려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Live Wire’와 ‘Take Five’가 빠진 건 못내 아쉬웠지만.
솔직히 그날 서태지가 보여줬던 춤이 한창 젊었을 시절에 육박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서태지는 더 이상 1990년대의 서태지가 아니다. 1990년대 전반에 걸친 그의 신화적 존재감은 어쩌면 족쇄였을지도 모른다.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그의 ‘표정’이었다. 공연에서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심지어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그를 구속했던 족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특정 음악가나 트렌드가 특정 시대 10년 전체를 정의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사람들(과 평론가들)은 기필코 그걸 찾아내서 그 대상을 신화적인 위치에 놓고 싶어 한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놓고 나면 설(說)을 전개하고, 맥락을 분석하기가 쉬워진다. 세대론까지 들먹이면 더욱 좋다. 자신의 주장에 맞춤하게 디자인된 옷까지 입히는 셈이 되는 까닭이다.
1990년대를 상징하던 그는 이제…
문화 생태계는 그리 단일한 곳이 아니다. 게다가 서태지가 만능키처럼 통용되던 시절은 한참이나 지났다. 서태지뿐만이 아니다. 해외든 국내든 대중음악 자체가 문화계의 주도권을 상당 부분 상실한 지 오래다. 이제 대중음악은 개인의 오락이나 기분 전환용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제이지 같은 이는 뮤지션보다 사업가로 소개되길 원한다. 물론 명맥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다. 수많은 장르의 결합을 통해 또다시 수많은 장르를 쏟아내는 식으로 대중음악은 자신에게 씌워진 호흡기로 근근이 수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 어떤 ‘새로운’ 뮤지션이 ‘새로운’ 음악을 들고 나온다고 해도, 이를 바탕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시대라는 단어의 하중을 감당하기에 대중음악은 너무 파편화되어 버렸다. 평론가와 마니아들이 갈수록 ‘인디(펜던트) 음악’과 ‘로컬 신’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권 바뀌었으니 새 앨범 내자.’ 공연장에 걸려 있던 인상적인 플래카드였다. 서태지는 조만간 신보를 내고 팬들과 소통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더 나아가 그 이상은 이제 불가능한 시대라는 걸, 그날 서태지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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