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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피디가 증언하는 ‘탄압 3종 세트’

국은주 (KBS 라디오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9월 12일 화요일 제5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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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생각은 2008년 8월8일 오전 8시로 되돌아간다. 그날 정연주 사장을 해임하기 위한 이사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KBS PD협회와 기자협회 회원들은 오전 8시까지 이사회가 열리는 회사 본관 3층에 집결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 회사에 들어서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경찰차가 회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뭔가 불안한 긴장감이 회사를 뒤덮고 있었다. 이른바 ‘짭새’들이 대학에 상주하던 시절, 큰 시위가 있기 직전 캠퍼스에서 느껴지던 그런 긴장감과 불길함, 딱 그 느낌이었다. 가방을 두러 자리에 들렀다가 회의실 앞으로 내려가기 직전, 분명히 망설임이 있었다. 약간의 두려움, 상당한 귀찮음, 오늘 하루 이 이사회를 막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하는 회의감, 이런 상황에 대한 짜증….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동료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스스로가 자랑스럽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명확해졌다.

그날 이후 감사실에 불려 다녔다. 시위를 선동했다는 혐의인데, 감사실에서 제시하는 CCTV 화면을 보니 나는 벌떡 일어나 구호와 노래를 선창하고 있었다. 화면 속의 내가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내심 자랑스러웠다. 한 달 반 후, 한민족방송으로 발령이 났다. ‘8·8 사태’ 직후 만들어진 KBS 사원행동에서 열심히 활동한 사람들에 대한 보복 인사였다. 대북방송 채널인 한민족방송은, 1년 정도 근무를 하면 다시 국내 방송으로 돌아오는 게 관례였다. 짐을 쌀 때만 해도 다시 국내 방송으로 복귀할 때까지 7년여나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내가 떠난 지 1주일 만에 당시 내가 맡았던 주말 시사 프로그램 작가와 게스트 대부분이 잘려나가며 초토화됐다(그때 잘린 게스트들이 요즘 팟캐스트를 주름잡고 있는 김용민 PD, 민동기 기자, 최강욱 변호사 등이다).

ⓒ시사IN포토
2008년 10월5일 KBS <시사투나잇> PD와 작가들이 회사 측의 폐지 조치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 뒤에도 ‘말 안 듣는 사람들’을 뽑아서 지역국으로 보내려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마음은 먹고 있었다. 후배들을 보내느니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춘천으로 발령 났다. 지역 라디오의 발전을 위해서 지역의 PD들에게 ‘티칭과 코칭’이 가능한 중견 PD들이 꼭 가야만 한다고 강변하던 라디오 본부장의 말과 달리 춘천에 첫 출근해서 만난 방송국장은 내가 춘천으로 온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아, 우리는 사실 라디오 PD가 아니라 진행자가 진짜 필요한 상황인데… 혹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좀 해주시면 안 되나요?” 나는 거기서 만 1년 동안 <라디오 춘천>이라는 프로그램을 맡아서 생방송 진행자 노릇을 했다.

2011년 4월, 서울에 있는 후배들의 끈질긴 요구와 투쟁에 힘입어 서울로 복귀했다. 국내 방송 쪽으로 보내달라고 강력히 얘기했지만 다시 대북 방송채널로 발령이 났다. 시사와는 거리가 먼, 한밤중의 음악 프로그램에 배정됐다. 무력감과 좌절감이 나를 갉아먹었다. 살지도 죽지도 않은 듯한 그 느낌을 견딜 수 없어서 2012년 안식년을 냈다.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3월부터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안식년 기간이었지만 95일간 파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했다. 파업 기간 내내 담당 부장은 끊임없이 ‘귀하는 불법 파업에 참가 중입니다’라는 문자와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4월17일 선전전을 하러 사무실을 도는데 부장들이 웃으면서 휴대전화로 채증을 했다.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이 있었다.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나. 인간에 대한 회의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것 역시 시작이었다. 사흘 후 회사는 부장들이 찍은 채증 동영상을 첨부해 나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이때부터 시작한 재판은 마무리하는 데 3년이 걸렸다. 그것도 괴로웠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건 바로 채증을 하고 증거로 제출한 그 부장이 내 담당 부장이라는 점이었다. 수차례 국장과 센터장에게, 적어도 소송의 상대편인 사람에게서 인사고과를 받는 일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너에 대한 인사권은 나에게 없다” “그건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이름만 국장이지 아무 권한이 없다” 따위 황당한 얘기만 되풀이했다. 결국 나는 최하위 고과를 받았고 저성과자로서 인사부에 경위서를 쓰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지방 발령, 재판 회부, 저성과자 낙인이라는 ‘탄압 3종 세트’가 완성되었다.

바른 소리를 내고 파업에 참여했던 이들이 국내 라디오 제작에서 배제되는 동안 시사 전문 채널이던 1라디오는 철저히 망가져갔다. 정관용 교수 등 밉보인 진행자가 하차했고 거의 6개월마다 프로그램의 이름과 포맷이 바뀌었다. 개편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시사 프로그램의 전면 폐지였다. 그들은 야금야금 편성을 바꾸더니 결국 고대영 사장이 취임하고 나서 명분도 설명도 없이 그나마 남아 있던 두어 개 시사 프로그램마저 라디오 PD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도국으로 이관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KBS 라디오국은 몹시도 고요한 세상이 되었다. 바깥세상이 제아무리 들끓고 요동을 쳐도 시사를 뺀 ‘교양’과 ‘정보’ 프로그램들만 남았다. 지난해 10월29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감기에 걸렸던 두세 번을 빼고는 촛불집회에 빠지지 않고 나갔다. 살 것 같았다. 내 안에 쌓여 있던 무기력함, 좌절감, 분노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지독한 소외감이 몰려왔다. 광장에서 소리치는 나는 떳떳한 민주시민인데, 공영방송의 PD로서 나는 어떤 PD인가, 그 두 간극이 너무 아득해서 촛불을 마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이제 다시, 제작 거부가 시작됐다. 후배 PD 누군가는 말했다.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싸움이 되었으면 좋겠노라고. 나는 안다. 고대영 사장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거리에서 대통령 물러나라고 외치는 것은 쉽다. 광장에서 사장 물러나라고 외치는 것도 상대적으로 쉽다. 사무실 내 자리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부장·국장과 싸우는 것이 사실은 가장 어렵고 불편하다. 이제 나는 확실히 안다. 일상 안에서의 그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 저 앞의 모든 전선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내 안의 타성과 적당히 타협하고 한 발 한 발 물러서다 보면 2022년 어느 날 또다시 8월8일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9년을 돌아 다시 그 자리다. 40대 중반이었던 나는 훌쩍 50대 중반이 눈앞이다. 오늘도 결국 그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에 동료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스스로 자랑스럽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나는 오늘도 집회에 참석하러 씩씩하게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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