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범자들〉에 내가 MBC 본사 건물 앞 스케이트장에서 눈을 쓸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낯설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래, 나는 저렇게 견디고 있었어’라며 영화 속의 나를 조용히 위로했다. 부끄러움과 패배감이 가끔씩 상기되었지만 어느덧 영화는 개인의 패배들을 모아 저항의 기록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영화는 ‘우리가 다시 과거를 딛고 승리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난 9년은 언론악법 저지 파업과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전국언론노조에 파견 가 있었다. 이명박 정권의 언론 장악 실행 계획을 언론노조와 산하 조합원들이 온몸으로 막아내던 시절이었다. 

2011년 〈PD수첩〉으로 복귀한 나는 ‘5·24 남북경협 중단 2년’ 프로그램을 준비하다, 국장의 제작 중단 지시 불이행으로 용인 드라미아개발단으로 전보되었다. 회사 간부들은 내가 정권의 기조와는 어긋나는 ‘친북적인’ 아이템을 다루려 했기 때문에 찍어서 먼 곳으로 보냈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했다. 2011년 봄부터 용인으로 출퇴근하는 시간은 왕복 다섯 시간이 넘었다. 드라미아는 주로 사극을 촬영하는 드라마 세트장이다. 그곳에서 나는 외국인 관광객을 안내하며 시간을 보냈다.

두어 달 뒤 법원이 일방적 발령이 부당하다는 부당전보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다시 〈PD수첩〉으로 복귀했다. 법원 판결이 난 지 며칠도 안 되어 회사 측은 본사 사무실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나를 다시 일산에 있는 MBC 제작센터의 한 사무실로 내보냈다. 특별히 일을 주지 않았다. 텅 빈 사무실에서 책을 읽거나 호수공원 주변을 걸었다. 서울 여의도 본사와는 자연스럽게 격리되었다. 해가 바뀔수록 나 같은 유배자는 늘어나고 경영진의 방송 전횡은 극에 달했다. 프로그램과 뉴스는 갈수록 엉망이 되었다.
 

ⓒ영화 〈공범자들〉·뉴스타파 제공2014년 신사업개발센터로 발령을 받은 이우환 MBC PD(오른쪽)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스케이트장의 관리를 맡았다.


2012년 초 견디다 못한 구성원들은 공정방송 쟁취를 위한 또 한 번의 절박한 싸움에 내몰렸다. 파업의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조합원들은 겨울에서 여름을 지나도록 싸우고 또 싸웠다. 절망적인 현실을 바꾸고자 했지만 제도와 권력은 우리를 조롱하듯이 압박하고 고립시켰다. 우리의 싸움은 170일째 이어졌지만 파업의 결과는 무서웠다. 파업 이후 대규모 보복과 격리가 시작되었다. ‘김재철 경영진’은 수많은 조합원들에게 3개월 자택대기 발령을 내 회사와 격리시켰고 연이어 100여 명을 골라 ‘신천교육대’를 만들었다(우리는 서울 송파구 신천역 근처에 있는 MBC 아카데미 교육장을 ‘신천교육대’라고 불렀다). 여기에서는 바리스타, 제빵, ‘바르게 살기’ 같은 교육이 이어졌다.

1년 가까운 교육 기간에 여의도 본사는 출입할 수 없었다. ‘신천교육대 전보’ 또한 절차적 위법이 상당했지만 이번엔 부당전보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는 데 1년이 걸렸다. 체제가 공고화할수록 법원의 반응도 더뎌졌다. 2013년 6월 나는 또다시 회사가 아니라 법원의 결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회사의 일방적 전보가 위법이었다는 것을 법원이 두 번이나 확인해주었지만 회사는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위법행위가 공공연하게 확인될수록 낙인의 수단으로 삼았다. MBC에서 법원의 효력은 일시적이었고 오히려 회사에 찍힌 괘씸죄는 오래갔다.

2014년 4월, 세월호가 침몰했고 나는 그때 다큐멘터리 팀에 있었다. 회사는 긴급 다큐 제작을 지시했다. 우리는 팀을 만들어 제작을 시작했다. 촬영 하루 만에 회사 측은 다시 제작 중단을 지시했다. 국가적 참사를 조직적으로 회피하려는 회사의 조치에 저항했다. 나에게는 인사고과 낙제점이 주어졌고 다시 저성과자 교육을 받아야 했다. 저성과자 교육 이후 나는 2014년 11월 광화문에 급조된 신사업개발센터로 발령 났다. 여기에서 스케이트장을 관리하며 겨울을 세 번 보냈다. 폭설이 쏟아질 때면 나는 눈을 쓸었다. 동전교환기가 고장 나자 동료 박종욱 기자는 동전을 바꿔주는 일을 했다.

지난 4월 부당전보에 대한 세 번째 판결이 나왔다. 2년 반 만에 나온 대법원 승소 판결이었는데 스케이트장 강제 발령이 위법하다는 취지였다. 나는 비로소 세 번째 원직 복귀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도 싸워야 했던 지난날의 대가치고는 길고도 집요한 탄압과 격리였다. 나의 40대와 50대를 그렇게 보냈다.

MBC에서는 김재철·안광한에서 김장겸 사장으로 바뀌는 요식행위가 있었을 뿐 어떤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날 우리는 마치 링에 오른 그로기 상태의 권투 선수처럼 견딜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스케이트장은 아무도 수건을 던져주지 않는 사각의 링 같았다. MBC는 안으로 썩어 들어갔고 국민은 MBC를 비난했다. 촛불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스케이트장에서 저성과자로 해고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100명이 넘은 MBC 유배자들은 변방을 떠돌다 존재조차 잊혀갔을 것이다. 나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MBC를 국민들이 가까스로 붙잡았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지난 두 차례 파업에서 죽도록 싸우고도 질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장애물들을 걷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촛불이 MBC가 회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MBC 창사 이래 최대의 투표율과 파업 찬성률이라고 한다. 공영방송 MBC를 살리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나에게는 마지막 파업이 될 것이다.

기자명 이우환 (MBC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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