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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지킨 ‘빨간 마후라’

1951년 김영환 공군 편대장은 공비 토벌을 위해 경남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적을 폭격하려는 전의와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도 그는 천년의 세월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9월 13일 수요일 제5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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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갈무리
김영환 장군(1921~1954)은 최초로 전투복에 빨간 마후라를 착용했다.

한국 영화의 이른 절정기라 할 1950~1960년대를 빛낸 영화감독 가운데 신상옥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지. 이분은 2006년 여든의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그 영결식장에 매우 절도 넘치는 손님들이 찾아왔어. 다름 아닌 공군 군악대였지. 그들은 숙연해 마땅한 영결식장의 분위기와 걸맞지 않은 신나고 힘찬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어. <빨간 마후라>라는 노래였어. 신상옥 감독이 1964년에 만든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였어. 이 영화가 대히트를 치면서 공군 전투기 파일럿 하면 빨간 머플러(마후라)를 연상하게 됐고, 이 노래는 자연스럽게 공군을 상징하는 노래로 굳어졌던 거야. 공군 측이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에 특별히 이 노래를 바치겠다고 나선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지. 그런데 이 빨간 마후라를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 있었어. 누구였을까?

1946년 미군정하에서 국방경비대가 창설됐어. 육군은 비교적 빠르게 대오를 갖췄지만 공군은 거의 ‘논외’였지. 미국조차 그 즈음 육해군 항공대로부터 공군을 독립시키고 있으니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조선에서 ‘공군’이란 상상하기 어려웠을 거야. 하지만 항공 기술을 익힌 일곱 명이 국방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장교로 임관하면서 ‘항공 전력’에 대한 문제가 제기돼. 그 일곱 명 중 연배는 가장 어렸지만 영어에 능통해서 미군정청 통위부(국방부) 정보국장 대리까지 꿰찬 김영환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는 조선에 무슨 항공대냐며 코웃음을 치는 미군 장교를 물고 늘어졌어. “비행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앞서 말한 공군의 시초라 할 장교 7인은 광복군에서 활약한 최용덕도 있었지만 대부분 옛 일본군 출신이었지. “일본군 출신?” 하며 네가 볼멘소리를 낼 수도 있겠다만 조선 천지에서 비행 기술을 익힌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 같구나. 하다못해 북한 인민군 공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활조차 일본 항공학교 출신이었으니까 말이야. 우여곡절 끝에 1948년 5월 경비대 내에 항공 경비대가 창설됐고 이를 모태로 1949년 10월1일에는 정식 대한민국 공군이 출범해. 초대 참모총장으로는 김정렬이 임명됐지. 그는 김영환의 친형이었어(김정렬은 일본군 비행중대장까지 했으니 친일 시비는 피할 수 없고, 1993년 공군사관학교에 동상 건립이 추진됐으나 일부 장교와 생도들의 반발로 중단된 적도 있음을 적어둔다).

어느 날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의 사무실에 급박한 전화가 날아들었어. “비행기들이 한강 다리 아래를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들여온 연습기 L-4 있지 않습니까. 그 비행기 세 대가 그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기절초풍도 모자랄 소식이었지. 사실을 파악해보니 훈련기를 잡아탄 김신(백범 김구의 차남), 장성환, 그리고 총장의 동생 김영환 세 ‘악동’의 대담한 장난이었어. 김정렬 총장 부인의 회고에 따르면 총장은 이 악동들을 일주일 동안 영창에 가둬버렸다고 해. 장난을 친 이유는 “비행기가 들어온 게 너무 좋아서 그랬습니다”였어.

이윽고 전쟁이 터졌어. 장난기 넘치던 김영환을 비롯한 공군 장교들은 생사를 건 전투에 나서야 했지. 전쟁 초반에는 연습기 위에 올라타고 수류탄을 까서 떨어뜨리며 싸웠고 미군으로부터 전투기를 양도받은 이후에는 여러 작전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웠지. 그 와중에 탄생한 것이 ‘빨간 마후라’야. 공군 웹진 <공감>에 실린 김정렬 총장의 부인 이희재 여사에 따르면 사연은 이랬어. “남편이 자주색 옷감을 가져오셔서 그것으로 치마를 만들어놓았는데, 마침 방문한 시동생이 그 치마를 보더니 대뜸 자기에게 달라는 거야. 조종복에 마후라로 차면 멋있겠다고. 그래서 마후라를 만들어 줬지.” 즉 원래는 ‘자주색 마후라’였지만, 김영환이 근무하던 강릉 시장에서 단체로 맞추는 과정에서 이게 ‘빨간 마후라’가 됐다고 하네. “형수! 앞으로 공군 마후라는 이겁니다” 하면서 김영환은 그렇게 좋아했다는구나.

공군의 상징 ‘빨간 마후라’의 원조

1951년 여름, 김영환의 편대는 새로운 작전에 투입된다. 당시 지리산을 비롯한 소백산맥에는 빨치산들이 무수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 ‘산사람’들의 근거지가 되고 있는 한 구조물을 폭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그 구조물이란 뜻밖에도 가야산 해인사였어.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바로 그 해인사.  

빨치산들은 산간 지역을 주 무대로 했고 산중에 있는 절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의 은거지이자 집결지가 됐지. 당연하게도 이쪽의 군경은 빨치산에게 유용한 절들을 없애려 들었고 말이야.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하는 전쟁터에서 문화재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어. 천년 고찰인 오대산 월정사가 불탔고 에밀레종에 버금간다 할 옛 선림원 동종도 녹아내렸어. 만해 한용운의 자취가 서린 백담사도 재가 돼버렸으며 그 외 수많은 보물이 사라졌지. 유감스럽게도 그 대부분은 우리 군대와 경찰의 손에 파괴됐어. 해인사도 그럴 위기에 처했지. 몽골의 군대에 맞서고자 하는 지성으로 새겼고 임진왜란의 그 큰 참화도 용케 피했던 불굴의 기념물 팔만대장경도 땔감이 될 판이었어. 그런데 편대장 김영환은 “적들이 해인사로 몰리고 있습니다” 하는 부하의 채근을 들으면서도 끝내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해.

그는 해인사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대장경판에 든 천년의 세월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거야. “우리도 항공대를 가져야 합니다”라며 미군 장교를 들들 볶던 젊은이, 한강 다리 아래를 비행기로 통과하여 사람들을 기겁시킨 악동, 형수의 자줏빛 치마를 보고 “형수. 그거 마후라 만들어주쇼”라고 말해 ‘빨간 마후라’의 원조가 된 공군 파일럿은 그렇게 국보를 구한다.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일설에 따르면 “사찰이 나라보다 귀하냐?”라고 힐난하는 이 앞에서 김영환 편대장은 이렇게 답했다고 해. “나라보다 귀한 사찰이야 없겠지만 해인사는 공비(토벌)보다는 귀하지 않겠소.”

그는 이런 글을 남기고 있어. “조종사들에게 적을 분쇄할 생각 외에는 없다고 해도… 집중된 목표밖에는 전연 생각 아니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들은 금수강산 중에서도 금강산의 고운 단풍을 볼 적마다 지극히 우아한 시정을 가질 수 있다.” 적을 폭격하려는 전의와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도 그는 금강산의 단풍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어. 시를 읊어 찬미하고 싶어 할 만큼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대상의 가치를 가슴에 담았던 사람이었지. 그랬기에 그는 팔만대장경을 품은 해인사를 차마 폭격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연합뉴스
경남 합천 해인사는 매년 김영환 장군 호국 추모제를 열고 있다.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뜻을 기리고자 2010년 8월21일, 문화재청은 김 장군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위).

6·25 전쟁 당시 명령에 따라 살고 명령에 따라 죽는 군인은 많았다. 하지만 그 명령이 잘못됐을 때, 또는 양심상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일 때 그를 거부하는 군인은 드물었어. 전쟁은 핑계가 됐고 전시(戰時)는 합리화의 근거였으니까. 그 속에서 많은 민간인이 학살됐고, 참으로 아까운 문화재들이 잿더미로 사라졌어. 김영환은 누구보다 용맹했으면서도 그 용맹이 쓰일 데를 가릴 줄 알았던 현명한 군인이자 ‘빨간 마후라’였어. 


그는 최후까지도 전설이었어. 강릉 공군 행사 참석차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1954년 3월5일 대관령 어디쯤에선가 자취도 없이 실종되어버린 거야. 수색대가 그의 흔적을 더듬었지만 그의 애기(愛機)도, 그도 태백산맥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 비행기 위에서 굽어보는 경치에 감탄하다가 바다에라도 빨려 들어간 것인지, 하늘로 솟은 것인지 그것은 알 길이 없네. 김영환 준장(추서)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아니 그 이후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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