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한국인은 흰 우유만 138만4000t을 마셨다.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빵·과자류, 빙과류는 거의 없다. 크림과 치즈 제품은 어린이의 인기 간식이다. 1902년 프랑스인이 홀스타인 종 젖소를 서울 신촌역 부근에서 사육한 이래의 엄청난 변화다.

유목 문화권에서는 1년 내내 새끼 낳고 젖을 내는 암소, 암양, 암말 등을 대했다. 분만 뒤 열 달이나 젖을 내는 젖소가 오랜 세월을 거쳐 선별되다 품종까지 이루었다. 대표적인 젖소 품종인 홀스타인 육종 역사는 2000년에 이른다.

 

ⓒ개인 소장'채유’는 조영석이 남긴 사생집인 〈사제첩〉 가운데 한 장면이다.

유목 문화권과 달리 한반도 우리 조상들은 고기나 젖 때문에 소를 치지 않았다. 소는 농사일의 동력으로써 소중했다. 늙거나 다치면 그제야 소를 잡았다. 우유도 그랬다. 암소가 송아지를 낳고 나서, 송아지와 나누어 먹는 식료였다. 우유는 보통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우유는 오로지 임금과 그 주변, 또는 권력과 돈이 있는 극소수를 위한 약재였다.

유지방을 이용한 크림이나 버터의 생산 및 공납은 세종 때까지는 조선에 통합된 달단(韃靼:타타르족)의 후예가 도맡았다. 이들을 수유치(酥油赤)라고 했는데 황해도·평안도에 거주하는 천인이었다. 이들이 만든 ‘수유’란 크림 또는 버터로 추정된다.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이 남긴 사생집인 〈사제첩(麝臍帖)〉 가운데 ‘채유(採乳)’는 어렵게 우유를 얻던 모습을 손에 잡히듯 보여준다. 젖을 짜겠다고 나선 이가 무려 네 명이다. 먼저 한 사람이 송아지를 암소로부터 떼놓아야 한다. 암소의 코뚜레를 붙들고 암소의 뒷다리를 묶어 버티는 데에 다시 둘이나 든다. 유목민이라면 어린이나 부녀자 혼자 네발짐승의 유통에 바짝 붙어 앉아 무심히 손을 놀리겠지만, 그림 속에서 젖을 짜는 인물은 제 엉덩이를 소 앞다리 쪽으로 빼고 엉거주춤 앉았다. 뒷발질을 당할까 얼마나 겁이 났을까. 저 넷이 모두 의관을 갖추고 있는 걸로 보아 왕실의 음식을 맡은 사옹원 또는 임금의 진료를 맡은 내의원 소속 관원일 것이다.

우유는 바로 마시지 않았다. 주로 타락죽(駝酪粥)의 재료로 썼다. 타락죽은 우유죽이다. 쌀을 물에 불린 뒤 갈아서 체에 밭쳐 끓이다가 다시 우유를 섞어 끓였다. 왕실의 타락죽은 점점 상류층으로 퍼졌다. 1809년 〈규합총서(閨閤叢書)〉의 ‘타락’ 항목을 풀어 쓰면 이렇다. “쌀을 담갔다가 무리(쌀 앙금)를 정하게 갈아 밭치고, 우유가 한 사발이면 무리는 다소 적게 한다. 묽고 되기는 잣죽 쑬 때 쓰는 무리만큼 하여 먼저 쑤다가 반쯤 익거든 우유를 섞어 쑨다. 이것이 내국 타락법이다.” 내국은 내의원의 별칭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유는 극소수 최상류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대중이 우유를 즐기는 오늘날에야 드디어 유제품 문화사가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더 세련된 우유 음식과 유제품을 상상하며

우유와 유지방은 아직 한국인이 충분히 감각하고 충분히 써본 적이 없는 식료이지만 뜻밖의 즐거운 발견과 발명이 없으란 법도 없다. 콩 원료 장의 풍미와 농익은 치즈, 요구르트의 풍미가 서로 통한다. 명란젓과 마스카포르네의 조화, 창난젓과 치즈의 조화도 대단하다. 크림, 버터, 리코타, 요구르트 또한 우리 음식과 어울리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음식의 다채로움이란 결국 시도의 다채로움에서 비롯한다. 어느새 우리 곁에 자리를 잡은 우유를 더 잘 쓰고 더 적극적으로 쓸 방법은 없을까. 조영석의 소담한 그림 앞에서 사옹원·내의원·수유치가 하던 것보다 한발은 더 나아간, 더 세련된 오늘의 한국 우유 음식과 유제품을 상상한다.

기자명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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