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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별’보다 빛났던 하사 신박균

1950년, 열일곱 살의 신박균은 전쟁이 터지자 즉시 입대했다. ‘장군의 아들’이자 ‘장군의 동생’인 그는 출신 성분의 ‘빽’을 지워버리고 포병대 졸병으로 근무하다 전사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9월 04일 월요일 제5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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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나라 합동참모본부 의장, 즉 군 최고위직을 지낸 이순진 대장이 42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어. 그동안 45번 이사를 다녔고 동생들 결혼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 노장(老將)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비행기 표를 선물했지. “캐나다에 산다는 딸 집을 부부 동반 방문하시라”는 취지로. 육군 대장 부부가 공관병들을 종같이 부린 일이 폭로돼 구설에 오르고 군인들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은 터에, 졸병들에게도 워낙 따뜻하게 대해 ‘순진이 형’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는 진짜 군인의 퇴장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더구나. 그런 뜻에서 오늘부터 몇 주간은 대한민국 군 역사에 등장하는 참 군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해.

ⓒ국가기록원 제공
1951년 11월20일 중공군 적진을 폭파하기 위해 곡사포를 장전하는 미군 제25사단 소속 군인들.

한국전쟁 때 나온 우스개 아닌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국군 병사들이 마지막 순간 내지르는 비명 소리는 무엇일까?’ 답은 ‘빽!’이야. 무슨 의미인가 하면 ‘빽’을 쓰지 못해 전방으로 왔고, ‘빽’이 없어서 결국 총 맞고 죽는다는 슬프고 안타까운 농담이었지. 이건 객쩍은 농담만은 아니었어. 한국전쟁 당시 한국의 부유층, 특권층 가운데에는 이게 전쟁을 치르는 나라 국민인가 싶을 만큼 ‘갑질’하고 횡포를 부린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야.

6·25가 발발하고 얼마 못 가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렸어. 낙동강을 건너려는 인민군과 막으려는 국군과 유엔군이 이 악문 혈투를 벌이던 그즈음, 육군 본부는 한 대령을 불러 ‘특수 임무’를 부과했어. 헌병 1개 소대를 이끌고 부산항 일대의 선박을 수색하라는 거였지. 그들이 부산 앞바다에 떠 있던 배들을 덮쳤더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풍경이 펼쳐졌어. ‘유명 정치인과 고위 장성까지 붙들려 왔는데 이들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배에 탄 채로 염탐을 하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중령급 이상 8명도 포함되어 있어서 체포(안용현, <한국전쟁비사>)’된 거야. 그 배들은 온갖 재산과 물건을 싣고 여차하면 일본이나 제주도로 튈 태세를 갖추고 있었어.

1950년 9월8일, 인천상륙작전이 9월15일이니까 여전히 국군 장병들이 필사적으로 인민군들을 막아내던 즈음 육군 참모총장 정일권 대장은 이런 포고를 내리고 있네. “1. 장병들의 요정·식당 출입을 엄금한다. 2. 입원 환자의 외출을 엄금한다. (중략) 4. 본부 장교는 일체 병영 내에 거주하라.” 즉 후방의 장병들이 요정, 즉 술집에서 권주가를 부르는 일이 많았고, 병원에는 가짜 환자들이 득시글거렸고, 병영 밖에 살림 차린 장교들도 많았다는 뜻이야. 다 ‘빽’ 있고 집안 배경이 좋은 특권층의 자제였겠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나라의 분위기가 이 지경이었다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은 게 용한 일 아닐까.

바로 그 무렵, 육군 포병학교에서는 신병들이 여름 내내 무더위와 싸우며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어. 신박균이라는 열일곱 살의 병사도 있었지. 그는 당시 중학생이었지만 전쟁이 터지자 즉시 입대했다. 신박균과 함께 훈련받던 장정들은 아마 두 번 놀랐을 거야. 우선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학생이 자진 입대한 것에 놀랐을 테고, 두 번째로는 그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동생인지 알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쳤을 테지. “아니 근데 왜 여기 있어?” 

ⓒGoogle 갈무리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신태영 장군(위)과 포병 사령관 신응균 장군(아래).
신박균 훈련병은 이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원로급 군인이자 1952년에는 국방부 장관에까지 오르는 신태영 장군의 아들이었어.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라 불리는 포병 사령관 신응균 장군의 막내 동생이었던 거야. 이 정도 ‘빽’이라면 졸병으로 포병대에서 포탄밥 먹지 않고 피란 수도인 부산의 ‘본부’에 근무하면서 군화에 광내고 댄스홀을 누벼도 무방할 출신 성분이었어. 이런 ‘장군의 아들’이자 ‘장군의 동생’이 대포 소리에 고막이 터져 귀 멀기 일쑤였고 어깨가 부서져라 포탄을 날라야 하는 포병대 졸병으로 근무한다는 건 당시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 신박균 훈련병은 그런 시선 자체를 의아해했어. 그는 집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구나.

“졸업을 앞두고 포병학교장님이 불렀습니다. ‘원한다면 신 장군(신응균 포병사령관) 밑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거기에 찬성해야 옳았겠어요? 아버님이나 형님 빽으로 위험을 피하고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한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아빠는 ‘군인 정신’을 떠나서 참으로 바르고 용감한 한 ‘인간’의 됨됨이에 감탄하게 돼. 신박균 하사인들 그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 훨씬 못한 ‘빽’을 지닌 사람들조차 악을 쓰고 용을 써서 군대를 빼거나 안전한 후방으로 배치 받던 사실을 몰랐겠니. 신박균 훈련병은 ‘남들이’ 그런 꼬락서니를 보고 어떤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지 알았기에 단호하게 아버지와 형의 ‘빽’을 지워버린다. “언니(형 신응균 장군을 의미)가 시찰을 오시는데 저의 훈련 태도를 보고는 만족한 표정을 짓곤 합니다. 이러한 형님의 얼굴을 볼 때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는 몰라도 저도 모르게 몇 방울의 눈물이 훈련복을 스쳐 땅 위에 떨어졌습니다. (중략) 어머니의 아들 박균이는 포병 사령관 신응균을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려지지 않아

훈련을 마친 뒤 신박균은 하사 계급을 받고 제26 포병대대에 배치돼. 그 동료들은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야. 신박균 하사는 이런 편지도 남기고 있어. “차라리 어리다는 트집을 잡으면 잡을 수도 있을 텐데 다른 전우들은 그것보다 우리 집 가문부터 따집니다. 차라리 이런 경우에는 장군 많은 문벌의 후손은 사병이 되기도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박균 하사는 참으로 고귀하고도 용감하게 자신의 존재를 빛낸단다. “극단의 관료주의적 관존민비 사상을 없애버려야 할 젊은 세대인 우리들은 이런 썩어빠진 나쁜 정신을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어머니, 아무튼 신 하사로 불리는 저를 명예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별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갈매기(하사 계급장)를 철모에 단 명예로운 신 하사는 제26 포병대대의 사병으로 일선을 누비며 싸웠고 중공군과 인민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 1951년 1월2일 가평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어. 전사라기보다는 소속 부대가 전멸하면서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쪽이지.

신박균 하사의 집안에는 별이 여섯 개였다.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출신인 신태영 장군과 그 장남 신응균 장군은 모두 중장으로 예편했어. 이 둘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였지. 아버지 신태영은 동료들이 일찌감치 한국군에 들어가 높은 자리 차지할 때 그를 마다하고 근신하다가 뒤늦게 군대에 참여했고, 신응균 또한 자신의 일본군 경력을 부끄러워하여 학교 수학 선생을 하며 군인 되기를 사양하다가 1948년에야 장교가 됐지. 부자(父子)의 일본군 경력을 비호할 생각은 없다만, 그렇듯 부끄러움을 아는 집안이었기에, 명예의 소중함을 이해하는 집안이었기에 참되고 바른 인간이자 군인이었던 신박균 하사를 배출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사진 한 장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을 신박균 하사의 명복을 빈다. 진흙탕 속에 핀 연꽃 같은 신 하사 같은 이가 있었기에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았다고 되뇌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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