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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회색 머리 사랑을 모욕한 남자

새집의 정화조를 보고 ‘시체를 버리기 딱 좋은 장소’라고 말했던 헬렌 베일리는 동거남에게 살해당하고 그 정화조에 던져졌다. 그녀의 반려견도 함께.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9월 06일 수요일 제5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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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 중 무엇이 더 어려운 일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사람을 죽이는 쪽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처음 한 번이 어려울 뿐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눈 질끈 감고 사람을 죽인 대가로 상당한 돈과 자유가 따라온다면 말이다.

헬렌 베일리는 매우 성공한 청소년 소설 작가였다. 애인이 생겨 집을 떠나겠다는 아버지, 좀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동생 등 집안이 그야말로 콩가루가 되고 있는 와중에도 외모 가꾸기와 친구 사귀기에 골몰하는 10대 초반 소녀의 이야기를 발랄하게 그린 일렉트라 브라운 시리즈가 유명하다. 다만 베일리의 최신작은 청소년물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이겨내는 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Mirror 갈무리
성공한 청소년 소설 작가 헬렌 베일리는 반려견 보리스와 함께 정화조에 버려졌다.

베일리의 남편은 2011년 바베이도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물에 빠져 죽었다. 그녀는 남편이 파도에 휩쓸려 죽는 것을 해변에서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그녀는 ‘슬픔 행성(Planet Grief)’이라는 제목의 블로그를 개설하고 22년간 같이 살아온 남편의 죽음에 대해, 그 없이 혼자 살아가는 일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둘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 곧 많은 사람들이 독자가 되었고 상당수는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중에는 베일리보다 한 해 전에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은 이언 스튜어트도 있었다. 네 살 연상의 스튜어트는 매우 다정하고 쾌활한 사람이었고, 베일리를 세심하게 배려해주었다. 베일리는 그에게 GGHW(Gorgeous Grey Haired Widower: 근사한 회색 머리의 홀아비)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들은 같이 살기 시작했고 블로그의 글은 책으로 출판되었다.

베일리는 거의 일평생을 살아온 런던을 떠나 전원 속의 대저택으로 이사했다. 스튜어트가 원해서였다. 베일리는 교외 생활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스튜어트를 사랑했고 그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베일리는 본인이 사망할 경우 400만 파운드(약 57억원)에 달하는 유산 중 대부분이 스튜어트에게 상속되도록 유언장을 새로 작성했다. 

ⓒPolice.uk
ⓒMirror 갈무리
희생자 헬렌 베일리가 범인 이언 스튜어트(아래)와 함께 살았던 대저택(위).

2016년 4월, 스튜어트는 베일리가 나흘간 집에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경찰에 전화했다. 자식처럼 아끼던 애완견 보리스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시간이 더 필요하니 바닷가 별장에 가 있겠다는 메모를 남겼다고 했다. 연락이 되지 않았고 별장에서도 그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전남편의 죽음에서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고, 결혼식이 이런저런 사건들 때문에 계획대로 추진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스튜어트의 설명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한편 베일리의 가족들은 그녀가 사라지기 전 몇 달간 끊임없이 졸려하고 쉽게 잊어버리고 주의를 집중할 수 없었으며 그것 때문에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사건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유명한 실종 사건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1926년 행방불명 신고가 되어 떠들썩하게 수사를 했으나, 11일 만에 스스로 돌아왔다. 경찰은 베일리의 실종 역시 고민에 휩싸인 유명 작가가 문득 은둔했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경찰은 베일리가 단순히 잠적한 게 아닐 수 있다고 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같은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흔적이 없을 수는 없었다. 예금을 한 푼도 인출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받지도 않았으며 SNS에도 전혀 접속하지 않았다. 그녀처럼 활발히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던 사람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경찰의 수색은 두 달간 지속되었다.

경찰은 전 부인 사망 경위도 다시 조사하기로

그런데 그녀가 사라진 지 닷새째 되던 날, 스튜어트는 예의 바닷가 별장을 방문했다. 그날 베일리의 전화가 별장의 와이파이에 자동으로 연결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스튜어트는 그녀가 사라진 날 베일리의 계좌에 접속해 온라인 이체 한도를 600파운드에서 4000파운드로 늘려놓았다. 더 나아가 스튜어트는 베일리 소유의 아파트를 매각하려고 시도했다. 경찰이 스튜어트의 행적에 의심을 품고 휴대전화를 조사할 수 있겠느냐고 요구했을 때, 스튜어트는 이를 거부했다.

경찰이 마침내 영장을 청구하여 그들이 살던 저택 차고 밑바닥에 있는 정화조를 조사하자, 부패한 지 오래된 베일리의 시체가 오물 사이에서 떠올랐다. 반려동물 보리스의 시체도 같이 발견되었다. 베일리의 남동생은 누나가 이 집을 사고 나서 문제의 정화조는 시체를 버리기에 딱 좋은 장소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당시 스튜어트는 남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베일리의 시신에 남은 머리카락에서 수면제 성분이 검출되었다. 스튜어트는 자신이 처방받은 수면제를 식품이나 차에 섞어 최소한 몇 달간 베일리에게 몰래 먹여왔다. 사건 당일 스튜어트는 베일리에게 수면제를 복용하도록 한 뒤 잠든 그녀의 목을 조르고는 정화조에 던졌다. 보리스 역시 죽여서 그 옆에 던져넣었다. 베일리가 보리스를 두고 떠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매우 장기간에 걸쳐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정말로 그가 베일리와 결혼할 생각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베일리가 약혼반지를 고르기는 했지만 스튜어트는 약혼반지의 대금을 지급한 일이 없다. 스튜어트가 베일리를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그는 용변을 볼 때마다 그 오물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시신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인 셈이다. 더구나 그 시신이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였던 바에야. 경찰에 따르면 베일리는 오물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 의식은 없었겠지만.

법원은 이 사건을 명백히 돈 때문에 벌인 것으로 보았다. 스튜어트는 부부로 살면서 베일리와 함께 돈을 쓰기보다는 그녀를 죽여버리고 그 돈을 혼자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살인 평결을 내렸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경찰은 스튜어트의 전 부인 사망에 관해 다시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전 부인은 집 정원에서 갑자기 죽었다. 목격자는 스튜어트뿐이었다. 앓고 있던 간질 때문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정황은 의심스러웠다. 스튜어트는 보험금을 포함하여 7만7000파운드(약 1억1000만원)를 손에 쥐었다. 이것이 살인이었다면 그는 살인이란 꽤 수지맞는 행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가 자백하지 않는 이상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전 부인의 시신은 화장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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