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세계적으로 케인스주의가 복귀한 시대에 보수파 경제학자들은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간판 경제학자인 에드먼드 펠프스 교수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지금은 케인스주의자들이 득세하지만, 곧 세력이 약해질 거예요. 두고 보세요.”

지금 한국의 많은 이들이 그와 비슷한 심정인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을 내세우자 보수적인 경제학자들과 언론은 이를 때리기 바빠 보인다. ‘성장의 결과가 소득인데, 소득을 높여서 성장하자는 것은 인과관계를 바꾼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소득주도 성장론이 경제학에서 극소수인 비주류 이론이며 근거 없는 가설이자 위험한 실험이라고 주장한다.

소득주도 성장의 원래 이론인 임금주도 성장론은 수요가 성장에도 중요하다는 포스트케인스주의 학자들의 이론과 실증 연구에 기초한 것이다. 이들의 모델은, 임금과 이윤 사이의 소득분배가 총수요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석한다. 노동소득의 몫이 높아질 때 총수요가 확대되는 경제를 ‘임금주도 체제’로 부를 수 있는데, 실증 연구에 따르면 여러 선진국들과 한국이 임금주도 체제다. 나아가 임금 인상으로 수요가 촉진되고, 기업들이 비싸진 노동력을 신기술로 대체하면 생산성도 따라서 상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비판자들은, 임금이 기업에겐 비용인 만큼 임금 상승이 투자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임금소득의 몫이 높아지고 소비가 늘어나 총수요와 성장이 촉진되면 거시적으로 투자가 저해되지 않을 수 있다. 이른바 ‘비용의 역설’이다.

다른 이들은 한국 경제는 수출의존도가 높으니 소득주도 성장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임금 상승이 수출에 미치는 악영향은 제한적이다. 제조업의 총매출액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10%에 불과하다. 현재 주력 수출품은 자본집약적 제품들이며 수출은 다른 요인들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국내의 실증 연구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임금과 노동소득 분배율이 높아지면 소비가 크게 늘어나는 반면 투자와 수출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생산성과 기업 이윤에 비해 임금과 가계소득의 비중이 오랫동안 낮은 상태인 한국에서 소득주도 성장의 추진은 적어도 단기적·중기적으로 수요를 확충하고 성장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연합뉴스8월3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최저임금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최저임금법 일부개정법률안에 찬성 표를 던지는 의원.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여러 비판은 별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소득주도 성장론도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어야 한다. 진보적인 경제학계 내에서도 논쟁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노동소득 분배율 자체가 총수요에 영향을 받거나, 외생적인 충격 혹은 경제의 구조 변화가 임금과 총수요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면 실증 분석 결과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설사 임금주도 경제가 아니라 해도, 임금을 높이고 불평등을 개선하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 경우 정부의 적극적 재정 확대가 함께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보수 경제학자들의 저주에도 케인스주의는 후퇴하지 않았다

소득주도 성장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정부가 민간 기업에 임금 인상을 강제하기 힘든 시장경제 사회에서 노동소득 분배율을 높이기는 실로 만만치 않다. 더 많은 복지와 증세에 기초한 소득재분배가 소득주도적인 성장을 위한 현실적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혁신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강조하듯, 정부는 혁신을 촉진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다시 선진국을 돌아보자. 7년 전 펠프스 교수의 기대와 달리 케인스주의는 후퇴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수파인 ‘공급 측면 중시’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감세와 규제완화 그리고 정부지출 억제를 주장하고 있다. 1980년대 레이건이 틀었고 트럼프도 내밀고 있는 경제학의 레코드판이다. 문제는 그것이 고장 났다는 점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들이 주장하던 낙수효과는 작동하지 않았고 불평등만 심화되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새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과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레코드판을 꺼낸 셈이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부터 하고 보는 이들은 스스로 물어봐야 할 것이다. 혹시 철지난, 고장 난 레코드판을 틀고 있는 건 아닌지.

기자명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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