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씨와 ㄴ씨는 이웃이다. 직장 위치도 가깝다. 2006년 어느 날 둘은 출근 시간도 비슷했다. 주차장에서 각자 자가용을 이용해 출근했다. 앞뒤로 나란히 차를 몰았다. 불행하게도 연쇄추돌 사고로 둘은 숨졌다. 사망 뒤 둘의 운명이 갈렸다. 노동자 ㄱ씨는 산업재해(산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공무원이었던 ㄴ씨는 공무상 재해 인정을 받았다. 출근길에 난 같은 사고인데도 노동자냐 공무원이냐에 따라 법 적용이 달랐다. ㄱ씨와 ㄴ씨 사례는 물론 가정이다. 하지만 지금도 ‘신분’에 따라 실제로 법 적용이 다르다. 보통 사람은 이해가 안 되지만 기존 판례의 늪에 갇힌 법관들은 문제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2005년 11월, 40대에 대법관에 오른 노동법 전문 김지형 대법관은 의문을 가졌다(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심을 맡은, 출근길에 사망한 노동자의 산재 여부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올렸다(대법원 판결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되는 소부에서 주로 이뤄진다. 소부에서 의견이 갈리거나 판례를 바꿀 필요가 있을 경우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로 넘긴다). 김 대법관의 문제의식은 7대5로 다수의견에 밀려 소수의견으로 그쳤다. 2007년 9월 대법원 다수의견은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등 출퇴근 과정이 사업주의 지배 관리하에서 일어나는 재해는 산재보험을 적용해야 한다”라고 판단했다. ㄱ씨처럼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노동자는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해 9월 헌법재판소는 이 법 조항도 평등 원칙에 위반된다며 6대3으로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김지형 대법관 등이 낸 소수의견과 똑같았다.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김영란·김지형·박시환·이홍훈·전수안 대법관을 ‘독수리 5남매’라 불렀다. 대법관 다양화가 이뤄진 시기였다. 이들이 퇴장한 뒤 ‘서울대·50대 남성·판사’ 출신이 대거 등장한 ‘양승태 대법원’이 어떠했는지 두 판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무효 소송(2014년)과 KTX 여승무원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2015년). 모두 1심 또는 2심에서 승소했다. 둘 다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무엇보다 두 판결 모두 전원합의체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소부에서 결정 났다. 대법관들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는 뜻이다. 대법관 다양화가 후퇴한 결과였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의 파격 인선과 탈권위 행보가 연일 화제다. 31년5개월간 재판 업무만 해온 김 후보자의 개혁 행보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그가 대법원장에 오르면 대법관 후보 임명제청권을 행사한다. ‘독수리 5남매’를 뛰어넘는, 대법관 다양화가 다시 만개하기를 기대한다.

마감 날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1심 판결이 났다. 박근혜 게이트를 쫓았던 기자들은 “사필귀정”이라고 평가했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박근혜·최순실 뇌물 혐의 최종 판결도 ‘김명수 대법원’이 처리해야 한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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