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회학자 아네트 라루는 미국 중산층 가정과 노동자 계층 및 빈곤층 가정의 9~10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양육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 연구했다. 민속지학적 연구방법론을 사용해 두 계층의 가정을 취재한 〈불평등한 어린 시절〉(에코리브르, 2012)은 중산층 아이들과 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이 확연하게 다른 양육과 교육을 받는다고 말한다.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난 게릿(10세)은 방과 후 정치가를 뺨칠 만큼 다양한 공적 생활을 소화한다. 게릿은 축구팀 두 곳에서 연습하며 야구팀과 수영팀에서도 활동한다. 집안의 하루 일정과 휴가 일정은 모두 게릿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반면 육체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청소 대행업체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둔 빌리(10세)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동네에서 자전거를 탄다. 중산층 아이들이 부모가 계획한 조직적 활동을 통해 학과 외 성장을 하는 동안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 아이들은 이웃에 사는 친구나 친척과 자유로운 여가를 보낸다. 중산층 부모들은 자녀 교육과 관련해 아이의 ‘집중 양육’을 강조하고,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 부모들은 ‘자연적 성장’을 신뢰한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란 피자나 호떡을 먹는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누구는 꼭 필요한 존재로 존중받으며 자라고, 누구는 자신을 집안의 혹처럼 여기며 자란다는 뜻이다.

아네트 라루는 빈부 계층 간의 교육 불평등을 양적 수치로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양적 수치에서 한발 더 나아간 지은이는 두 계층의 아이들이 다르게 경험했던 ‘집중 양육’과 ‘자연적 성장’이 어떻게 ‘문화 자본’으로 축적되는지 추적했다. 학부모나 아이 모두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학교 밖 활동을 통해 얻는 자질은 사회생활을 할 때 필요한 협력과 대화의 기술을 습득시켜준다. 작은 사회나 마찬가지인 학교 밖 활동을 경험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그만큼 미래의 사회생활에서 뒤처지게 된다.

ⓒ이지영 그림

아네트 라루의 책이 ‘흙수저’의 불평등한 유년 시절을 다루었다면, 로스 펄린의 〈청춘 착취자들〉(사월의책, 2012)은 그들의 청년 시절을 파고든다. 언제부터인가 의사가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닌데, ‘인턴(interne)’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원래 이 용어는 미국 의료계가 의과대학 과정을 마치고 병원을 비롯한 의료기관에 거주하면서 수련 과정을 밟는 수련의와 보조 의사를 가리키기 위해 1865년부터 사용해왔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턴십(interneship)이라면 의료계의 실무 수습제도를 뜻했다. 하지만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든 분야와 직종에 인턴 제도가 생겼다. 한국의 ‘다음 사전’도 미국에서 일어난 변화를 따라 반영했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정 수의 사원 후보를 선발한 후, 일정 기간 실습사원으로 채용하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어 ‘내부의’ 혹은 ‘기숙사생’에 어원을 둔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노동이 번성하기 전에, 오랫동안 이 말을 대신해온 것은 ‘시급제 노동’이었다. 한국 용법으로 아르바이트(Arbeit=part time)라고 불리는 이것과 인턴은 장기 고용이나 정규 직원이 아니라는 뜻에서 똑같아 보이지만, 호떡이 둥글다고 피자가 아닌 것만큼 인턴과 아르바이트는 다르다. 아르바이트는 햄버거 집에서 패티를 굽는 것이고, 인턴은 국회의원 보좌관실의 보조가 되는 것이다. 인턴은 이력서에 쓰면 취직에 필요한 강력한 제원(諸元)이 되는 것이고, 아르바이트는 써봤자 제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금수저들만 향유하는 ‘문화 자본’

곧바로 취직으로 연결될 수 있거나 높은 제원을 쌓을 수 있는 ‘노른자 인턴십(plum interneship)’은 연줄이 있어야 하는 데다가 대부분 무급이나 자원봉사라는 형식을 취한다. 그 때문에 한 푼이 아쉬운 흙수저는 계속해서 햄버거 패티를 뒤집게 되고(또는 무급 인턴을 하면서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노른자 인턴은 자금줄과 연줄이 든든한 금수저가 독차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문이 워낙 좁기 때문에 무급이거나 임금 착취나 마찬가지인 인턴에 목을 매달게 되고, 그 약점을 간파한 사용자는 노동법의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인턴십을 확대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코리 M. 에이브럼슨이 2015년에 출간한 〈불평등이 노년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코리브르, 2015) 역시 민속지학적인 연구방법론을 이용해 중산층과 빈곤층 동네에 사는 노인들의 삶과 의료 제도를 비교했다. 돈은 노년의 건강을 더 잘 지켜주고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받게 해준다. 그런데 개개인의 호주머니 사정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부자의 노년에 유리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미국이 자랑하는 기부 문화는 부자 동네에서 더 많은 기부금이 갹출되며 그 돈은 자기 지역에 먼저 사용된다. 이는 부자 노인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살게 됨을 뜻한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
아네트 라루 지음
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노년을 이해하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모든 사람이 경기장에 들어올 만큼 오래 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늙는 것은 계층화한 과정이다. 미국에서 누가 늙을 정도로 오래 살지, 누가 늙을 기회를 얻기도 전에 죽을지는 대체로 사회적 불평등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적으로 혜택을 덜 받은 사람들은 의료기관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고, 종종 유해한 환경에서 살거나 일해야 한다. 각각의 이런 상황이 직간접적으로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 불평등의 가장 근본적이고 적나라한 형태인 누가 살고 누가 죽을 것인지는 부분적으로 출생 당시의 사회적 지위에 달려 있다.”

부유층과 빈곤층이 각자의 계층적 경험을 어떻게 성향(문화적 산물)으로 내면화하는지 보여주려고 했던 지점에서 지은이는 2003년 출간되어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불평등한 어린 시절〉의 두 개념을 변용했다. 중산층 노인은 아프면 병원으로 달려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는 반면, 빈곤층 노인은 ‘병원은 병에 걸리러 가는 곳이고,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는 식으로 병원과 의사를 거부한다. 지은이는 전자를 ‘의학적 신체’로, 후자를 ‘자연적 신체’로 명명했다. 본문에도 간간이 나오지만 아네트 라루와 코리 M. 에이브럼슨은 미국 사회학계에 끼친 피에르 부르디외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여실히 증거한다. 세 권의 책을 연이어 읽고 나니 저절로 글의 제목이 떠올랐다. ‘흙수저 물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