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화이트 스완이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검정옷 남자가 오토바이를 몰고 흰옷을 입은 여자가 등에 바짝 붙어 있다. 8월 둘째 주말 서울 청파동 거리. “시적 표현이 참 좋네. 초등 3년이 완전 ‘문학소녀’일세. 그래도 옛날 같으면 유리는 시인보다 김 알렉산드라가 됐을 거야.” “김 알렉산드라가 누구야?” “누구지?” 아이의 물음에 이어 아이 엄마가 물었다. “나도 이번에 알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서. 그동안 몰랐던 게 참 부끄러웠다. 1885년생,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였어. 조선 여성 제1호 볼셰비키. 러시아혁명 때 적군(赤軍)으로 싸우다가 일본군과 결탁한 백군에 체포되어 서른셋에 죽었어. 아무르 강 모래밭에서 총살당했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는 전설이 있지. 열세 걸음을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왜 열세 걸음이었을까…?” 목이 메었다. 눈치 빠른 아이 엄마가 네이버를 검색했다. “아, 함경북도 함경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전신에 모진 고문 흔적이 남은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고, 후일 하바롭스크를 되찾은 시민들은 그를 슬퍼하여 2년 동안 아무르 강의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시사IN 신선영

‘회상열차’는 눈물의 여정이었다. 부끄러움과 반성의 길. 80년 전 18만여 선배들이 열차 화물칸에 실려 끌려간 길. 그 길을 우리는 일주일에 걸쳐 되짚었다. 선배들이 버려졌던 중앙아시아 황량한 벌판에 지금은 그들의 무덤이 누워 있다.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이주 정책은 2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비에트 건설에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때 처형당했다. 그래도 남은 이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곳에 한민족의 씨앗을 뿌렸다.    

연해주 우리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우수리스크. 그곳에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거주하던 옛집(사진)이 남아 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묵으면서 거사 계획을 세우고 점검했던 곳, 독립군에게 각종 병기를 제공했던 곳. 1860년대 초기 이주자 후손으로 러시아에 귀화해 사업가로 성공한 최 선생은 안 의사가 체포되더라도 재판관할권이 러시아에 있으므로 자신의 힘으로 안 의사를 도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일본의 압박은 심해졌고, 안 의사 재판관할권도 일본에 넘어갔다. 최 선생은 신한촌 참변에서 살해당할 때까지도 이를 매우 원통해했다.    

이준·이상설·이위종·이범석·이범윤·이동휘·오하묵·홍범도·여운형·안병찬. 아, 소리쳐 부르고 싶은 이름들이여!

기자명 표완수 (〈시사IN〉 발행인) 다른기사 보기 wspy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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