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에서 가장 성공한 좌파 정당으로 여겨지던 브라질 노동자당(PT)이 몰락 위기에 놓인 까닭은 무엇일까? 한때 전 세계 언론과 정치학자들의 찬사를 받던 정당이 갑자기 추락한 까닭은 무엇일까? 2016년 8월 말에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탄핵으로 쫓겨나더니, 그로부터 1년도 채 안 되어 지난 7월12일에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이하 룰라) 전 대통령이 10년에 가까운 실형을 선고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인기 많은 대통령’으로 불리며 브라질 국민 대다수의 박수를 받으면서 퇴임한 룰라 전 대통령이 최악의 위기를 맞았고, 노동자당은 1980년 창당 이래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 위기의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 룰라와 노동자당이 브라질 정치에 처음으로 등장하던 시기로 돌아가보자.

1980년 2월10일, 브라질 상파울루 중심가에 있는 조그만 학교 강당에 300여 명이 모여 노동자당(PT)을 창당했다. 참석자들의 행색은 모두 평범했지만 눈빛만은 빛났다. 그들은 자동차 기계공, 농민, 도시 빈민, 전직 게릴라, 해방신학 신부, 지식인, 전 공산당원 등이었다.

1978년 상파울루 총파업 당시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창당식이 열리던 소강당에는 연단도 없었다. 탁자만 하나 달랑 놓였다. 곧 당 대표로 선출될 35세의 선반공 룰라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참석자 중에서 양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깃발은 있었다. 이탈리아 천에 직접 수를 놓아 깃발을 만든 사람은 룰라의 부인 마리자 레치시아(1950~2017)였다. 한 지지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직접 만든 정당”이라고 감격했다. 훗날 13년간 브라질을 통치할 정당의 시작은 그렇게 조촐했다.

이 신생 정당과 당 대표에 대해 브라질 언론의 관심은 매우 컸다. 브라질 기자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룰라에게 물었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자입니까?” 룰라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선반공입니다.” 룰라는 정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이와 비슷한 유사한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사회주의자입니까? 사민주의자입니까? 좌파입니까?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선반공입니다.”

룰라의 이 대답은 그의 인생과 정치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룰라가 상파울루 위성도시의 금속노조 위원장에서 브라질 노동계급 전체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은 1978년에서 1980년까지 3년간 벌어진 총파업 때였다. 당시 독재정권은 물가상승률에 연동하는 임금제도를 시행 중이었다. 이 제도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국가가 임금 인상 상한선을 직접 정했고, 임금 인상을 막으려 물가상승률을 낮게 조작했다. 이 제도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독재정권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노동자들은 알고 있었다.

상파울루 파업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데뷔

상베르나르두의 금속 노동자들은 그때까지 동맹파업을 벌여본 적이 없었다. 1978년 한 공장이 파업을 개시하자 다른 공장이 연달아 기계를 멈추었다. 파업이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브라질 경제의 기관차’로 불리던 상파울루 대도시권 전역의 노동자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집단적인 저항을 벌인 것이다. 시작은 임금을 인상하는 것이었지만, 장시간 노동, 산업재해와 차별에 반대하고 독재정권의 억압 등에 맞서는 집단적인 저항이 되었다. 해가 지날수록 파업 일수가 늘어났고, 파업 가담자 수도 불어났다.

브라질에서는 파업과 시위가 불법이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총파업 기세에 독재정권도 놀라고, 민주화운동 진영도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파업 지도부가 놀랐다. 파업이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파업의 기세는 예측하지 못했다. 룰라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신들린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독재정권이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고 헬기를 띄우면서 파업 집회를 탄압했지만 노동자들이 물러서지 않고 파업 대열을 유지한 것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브라질 민주화운동 진영도 상파울루 노동자들의 힘을 인정했다. 노동자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독립적인 새로운 노동조합총연맹을 만들었다.

훗날 룰라는 노동조합 지도자로서 활약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들이 전진하면 나도 앞서 나갔다. 노동자들이 후퇴하면 나도 뒷걸음질쳤다. 나는 나 개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를 대표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소망이 곧 내 소망이다.” 룰라에게 세상을 바꾸는 재미는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파업으로 공장을 바꾸는 것에서 나아가 브라질 사회 자체를 바꾸고 싶었다. 그는 일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당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계기는 이랬다. 연대파업 첫해인 1978년 9월 룰라는 노조 지도자들과 함께 수도 브라질리아를 방문했다. 연방의회를 찾아가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전달하고자 했다. 하지만 의원 482명 가운데 그들을 만나준 이는 고작 2명이었다. 룰라의 신당 창당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노동자를 위한 법을 만드는 의원이 없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1980년 2월10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노동자당(PT) 창립회의 당시 모습(가운데 팔짱 낀 이가 룰라).

룰라가 정당을 만들겠다고 나서자 총파업을 응원하던 사람들도 반대하기 시작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거의 모든 사회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었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기업가들도 군사정권이 물러나길 바랐고, 노동 빈민들의 파업이 군사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때문에 총파업에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룰라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자들의 당을 만든다고 하자 ‘이방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좌파 세력도 반대했다. 그들에겐 독재 치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정당이 여럿 있었다. 공산당도 레닌주의 계열과 마오쩌둥주의 계열로 나뉘어 활동 중이었다. 굳이 새로운 좌파 정당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선반공 룰라의 생각은 명쾌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직접 만들지 않은 정당이 노동자를 대변할 리가 만무하다고 반박했다. 이 관점에 동의하는 인사라면 룰라는 그 누구와도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해서 더 진보적인 정당이 만들어지길 바라던 인사들이 노동자당(PT)에 합류했다. 신생 정당의 이념과 노선을 결정하는 데도 쾌도난마였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도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가 특별히 다른 사상을 신봉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브라질 자본주의 독재체제나 공산주의 체제나 노동자에게 모두 억압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도, 파업권도, 야당도 인정하지 않는 이념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간명하게 정리했다. 그렇게 낡은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좌파 정당이 탄생했다.

룰라는 노조에 가입하는 것조차 꺼려하던 평범한 노동자였다.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도 노조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도 없었다. 그런데 상파울루 노동계급의 지도자가 되더니, 신생 좌파 정당의 대표가 되었고, 그로부터 22년 뒤에는 대통령이 된다. 언젠가 룰라는 자신의 정치 인생을 브라질 국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에 빗대어 이렇게 묘사했다. “정치는 잘 빚은 카샤사(사탕수수 증류주)와 같다. 첫 잔을 마시고 나면 한 병을 다 비우기 전까지 절대로 멈출 수 없다.”

1980년대 내내 룰라가 이끄는 노동자당은 사회운동의 에너지를 대거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성장해갔다. 먼저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전투적인 정치세력으로 이름을 떨쳤다. 브라질 민주화 이행은 1979년 야당 설립 허용에서 1982년 연방의회 선거, 1986년 제헌의회 선거, 1989년 대통령 직선제 실시까지 10년간에 걸쳐 완만하게 이뤄졌다. 노동자당은 민주화 이행 속도를 높이는 구실을 했다. 민주화 진영과 손을 잡고서 1983년 “이제 직선제를!(Diretas Já)”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러 야당들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 운동을 열심히 벌였다.

노동자당은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1982년 외채 위기 이후에 국제통화기금 등 국제 금융기관이 외채를 빌려주는 조건으로 강요한 긴축재정·민영화·무역자유화 등에 반대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금융기관이 브라질의 경제 주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 농민운동, 해방신학 사제들이 주도한 도시빈민운동 등 여러 사회운동이 탄생시킨 대중 조직과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노동자당은 신자유주의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당이었다. 1993년 노동자당 전당대회 결의안에는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가 있는 한 인류에겐 미래가 없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공약도 매우 급진적이었는데, 외채 상환 거부, 은행과 광산 국유화, 급진적 토지개혁 등의 정책도 내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동자당은 계급 간 대결을 강조하던 급진 정당이었다.

ⓒEPA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전 브라질 대통령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며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사회운동의 에너지를 흡수한 노동자당은 각종 선거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창당 이후 처음으로 치른 1982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하원의원 8명을, 1986년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하원의원 16명을 당선시켰다. 1989년에는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선에 참여했다. 이 대선에서 룰라가 처음 후보로 나서서 결선투표 때 득표율 47%를 기록하기도 했다. 노동자당은 비록 대선에서는 패배했지만 지방정부를 운영하며 행정 경험도 쌓아갔다. 1988년 이래 브라질 최대 도시인 상파울루 시장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1994년 주지사 선거에서 2명이 당선되면서 노동자당의 지방정부 시대가 열렸다.

세 차례 대선 패배 이후 온건 정당 변신

1990년대를 거치며 노동자당은 좀 더 온건한 정당으로 변신한다. 노선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연이은 대선 패배 때문이었다. 1989년 대선에서 선전을 거두고 다음 대선에서 곧 집권할 것만 같았던 노동자당은 1994년과 1998년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했다. 그것도 결선투표까지 가지도 못한 채 1차 투표에서 완패해버렸다. 노동자당 내에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룰라 후보는 30%의 고정 지지층만 가진 후보로 굳어졌다. 1998년 대선 패배 직후 룰라는 당 지도자들에게 다른 후보를 찾아보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당 지도자들이 전국 순회와 토론을 거쳐 다시 룰라를 압도적으로 신임했다. 룰라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우선 노동자당은 이념이 다른 정당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노동자당은 이미 지방정부를 운영하면서 중도파·우파 정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좌파 지지층은 30% 안팎에 머물렀기 때문에 과반을 위해서는 이념이 다른 정당과의 연합이 불가피했다. 그렇다 보니 노동자당의 원래 정책과 구상은 협상을 거치면서 온건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급진적 경제정책에서도 벗어났다.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전 대통령(1995~2002년 재임)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1993년 2500%까지 치솟아 노동자들의 임금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렸던 물가가 기적처럼 진정된 것이다. 카르도주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해결하자 중산층은 물론이고 노동자당의 지지층인 노동계급도 환호했다.

노동자당은 인플레이션 억제 같은 거시경제 안정책을 계승하기로 결정했다. 세계화된 브라질 경제에서 급진적 정책을 추진할 경우 오히려 자본 유출과 같은 혼란이 일어나고 경제가 위기에 빠지게 되어 지지층인 노동계급의 지지까지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동자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현실적 제약도 받아들였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대선 전략도 새로 세웠다.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좌파가 단독으로 집권한다는 전략에서 벗어났다. 방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카르도주 정부가 만든 중도파·우파 정당연합을 좌파·우파 정당연합으로 대체하는 것, 다른 하나는 상층계급·중간계급의 유권자 연합을 노동계급·중간계급의 유권자 연합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당은 1989년 대선에서 “룰라를 찍어라! 나머지는 다 부자다”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걸면서 계급 간의 투쟁을 강조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숨기지 않던 정당이었다. 그런 정당이 수권 정당이 되기 위해 ‘사회주의’에 대한 언급도 자제하는 온건 정당으로 완전히 변신했다.

기자명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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