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은 변혁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정확히 나뉘어 있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 등으로 편 가르기를 하면서 싫든 좋든 더 많은 사람들이 진보와 보수로 편이 갈렸다.

노무현 정부 때로 돌아가보자. 노무현 정부에게 진보라는 수식어를 쓰기는 어려웠다. 아니 누구라도 스스로에게 진보·보수라는 라벨을 붙이는 것 자체가 겸연쩍었다. 지금의 범진보 세력은 노무현 정부 내내 분열되어 있었다. 당시 복잡한 사회문제에 대한 논의가 백가쟁명 식으로 이뤄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논의 과정은 성숙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금 그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는 게 중요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편 가르기는 우리 사회를 온통 이념적 전쟁터로 만들어놓았다. 노무현 정부 때 풀지 못했던 산적한 사회문제들이 다시 우리를 마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시 학생인권위원회 위원으로서 현장에 나가보면, 언론 등에서 학생 인권의 이념적 상징처럼 여기던 체벌이나 교복·두발 규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학교 문제의 본질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공부를 덜 하도록 할 수 있을까’이다. 부모·학생·전교조·교총 모두가 이 문제가 풀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노인 빈곤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초연금이라는 미봉책이 소수 빈곤층 노인을 배제하고 다수 중류층 노인들의 투표권과 교환되었다. 의무부양제에 대한 논의도 지난 10년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를 거치며 우리는 수많은 ‘악마’들을 겪었다. 사회가 부정의하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이런 확신이 악마의 후손 세력의 궤멸을 정치의 제1 목표로 삼게 만들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를 떠올려보자. 당시 과연 우리는 ‘우리 사회가 철저하게 부정의하며 이는 과거 청산의 실패 때문’이라는 확신을 지금처럼 강하게 갖고 살았던가? 그렇지 않았다. 황우석 사태, 한·미 FTA 추진과 같은 탈근대적인 굵직굵직한 이슈들 속에서 역사 전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다시 그 확신이 회자되고 ‘전투하는 진보’를 호명한 때는 바로 피아를 편 가름한 이명박·박근혜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범진보 세력이 정권을 되찾아온 지금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 이겼으니 우리는 ‘우유부단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엄중하고도 단호하게 과거 청산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발자국을 쫓아 다양한 정치 세력들과의 협상을 통해 실용주의적 성과를 내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인가?

공동체가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이 강해지면

이에 답하기 전에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세상은 어떻게 바뀌는가?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사람’은 문화를 말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갖추어도 그 제도는 악용되거나 남용될 수 있다. 사람이 바뀐다면 나쁜 제도는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개선될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생겨야 한다. 아마도 한국이 부분적으로나마 성공의 지표로 삼는 국가들-미국, 서유럽, 일본 등-과 한국의 차이점을 들자면 공동체에 대한 신뢰(Public Confidence)라고 본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란 공동체가 각각의 개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공동체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경합하고 상충하는 제도의 총체를 포괄한다.
 

 

ⓒ연합뉴스5월12일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방문해 ‘찾아가는 대통령-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 신뢰를 높이는 중요한 임무를 임기 초반에 성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 곳곳에서 ‘앞으로는 다를 것’이라며 심기일전하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빈곤 노인, 과로사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극심하게 불행한 나날을 보내는 중등 학생들을 위해 공동체가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이 강해지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성과라고 여겨진다. 노무현 정부 때 그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건국이 몇 년인지’를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이슈화했다고 해서 이제 와서 맞서고 따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기자명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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