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8월9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성모병원을 방문해 병원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의료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건강보험 보장 강화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8월17일은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이 되는 날이다. 100일 동안 공개된 청사진에서 문재인 정부는 ‘정상화’와 ‘실험’이라는 상반된 과제를 동시에 추구했다. 정상화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자산 삼아,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실험을 시도한다. 정상화와 실험은 통치의 서로 다른 차원에서 벌어진다. 국가 통치의 세 가지 차원을 그려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연합뉴스7월19일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정과제 보고대회에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정상화를 시도하는 차원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내놓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국정목표 1번이 ‘국민이 주인인 정부’다. 민주주의·인권·법치주의와 같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을 복원하겠다는 의미다. 2016년 겨울 촛불집회를 대표하는 구호는 “이게 나라냐”였다. 촛불집회의 최대 동력은 사회경제적 요구가 아니었다. 국가의 기본을 복원하라는 요구가 핵심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2016년 촛불집회를 ‘촛불 시민혁명’으로 규정하고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나라의 복원’은 자연스럽게 제1과제가 된다.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국가정보원 대공 수사권 폐지 등 권력기관 개혁 공약은 그래서 서로 맞물려 있다. 각각 검찰·경찰·국정원 이슈이지만, 본질은 국가권력을 어떻게 민주적 통제와 상호 견제 아래 두는가의 문제다. 그래야만 국가가 인권을 최대로 보장하는 보루가 될 수 있다.

권력기관 전횡은 인권침해로 이어진다. 국정원 간첩조작의 피해자 유우성씨,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의 피해자 김종익씨, 검찰 피의사실 공표의 피해자 노무현 전 대통령 등, 권력기관 전횡의 끝은 인권 참사였다. 문재인 정부는 인권을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로 본다. 인권은 정부가 그저 선언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인권 침해 가능성을 차단하는 민주적 통제 시스템이 작동할 때 지킬 수 있다. 국정기획자문위는 100대 국정과제 중 6번에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를 헌법기관으로 위상을 강화하고, 인권위의 권고를 정부 기관들이 더 적극적으로 수용할 방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인권위 권고 수용률을 기관 평가에 반영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이 경우 인권위는 ‘인권 감사원’에 준하는 위상을 갖게 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법치주의를 ‘엄격한 법 집행으로 국민이 법을 잘 지키도록 하는 것’으로 엉뚱하게 이해했다. 국가권력이 사전에 정해진 법에 따라 예측 가능하도록 행사되어야 한다는 법치주의 원리는 두 보수 정부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법치주의는 국가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제약하는 원리다. 권력기관 개혁, 인권 강화, 법치주의 회복은 그래서 한 묶음의 패키지다.

국가를 정상화하는 차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비교우위는 여론의 확고한 승인을 받았다. 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인권을 보장하려면 국가권력을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오랜 소신을 갖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권력기관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직접 체험했다. 이 과정을 복기하며 권력기관 개혁 전략을 야당 시절부터 준비했다. 뼈저린 경험도 겪었다. 보수로의 정권 교체 이후 권력기관 개혁이 역진한 결과, 2009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었고, 2012년 대선에서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피해 당사자가 되었다. ‘국가 정상화’ 영역에서 문 대통령만큼 경험과 의지와 이행 전략을 두루 갖춘 대안은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자유한국당은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을 촉발시킨 원인 제공자다. 바른정당도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다. 국민의당은 이 영역에서 문 대통령만큼 비교우위를 인정받는 리더를 갖고 있지 않다.

ⓒ시사IN 이정현

이 첫 번째 차원은 근본적으로 국가가 자신의 힘을 어떻게 제약할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문제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는 기구이므로, 국경 안에서 그 힘을 제 스스로 족쇄에 묶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도 국가를 신뢰한다. 권력자나 권력기관의 입맛에 따라 힘을 휘두르는 국가는 현대국가로는 기준 미달이다. ‘기준 미달의 정권’을 끌어내린 광장의 경험은 이제 국가가 제 힘을 어찌 제약할지 묻는다. 그 구체적인 표현이 인권·법치·민주주의이고, 그를 위한 실행 전략이 권력기관 개혁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이게 나라냐”를 묻던 이들은 꾸준히 지지를 보낼 가능성이 있다.

외교·안보는 두 번째 차원의 통치 영역이다. 외교·안보는 근본적으로 무정부 상태인 국제사회에서 벌이는 게임이다. 작동 원리도 게임의 법칙도 첫 번째 차원과는 크게 다르다. 첫 번째 차원이 국가가 독점한 힘을 제약하는 제도 설계 문제라면, 이 두 번째 차원은 국익을 극대화하는 최선의 전략을 찾아내고 실행하는 문제다.

외교·안보는 장기적인 전략 수행과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수의 조합으로 구성되므로, 100일을 두고 평가하기가 적절하지는 않다. 다만 청사진을 확인할 수는 있는데, 한반도 평화라는 대원칙 외에는 대체로 혼란스럽다는 평가가 있다. 전략적 큰 그림을 보여주기보다는 벌어지는 상황에 그때그때 대응한다는 의미다. 문 대통령이 야심차게 내놓은 ‘베를린 구상’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북·미 관계 냉각에 막혀 작동하기 어려운 상태다. 사드(THAAD) 추가 배치를 유예하려다가 전격 결정하는 과정도 “오락가락”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한·미 관계 강화 일변도에 대한 우려도

ⓒ연합뉴스6월19일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어린이들과 함께 서 있다.
ⓒ연합뉴스6월30일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100일 동안 보여준 외교·안보 노선에서 일관성 있는 대목은 한·미 관계 강화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특히 공을 들였고, 사드 배치도 물꼬를 텄다. 한·미 관계가 냉각될 경우 남북 관계에서 주도권을 놓칠 수 있다는 판단은 참여정부 시절에 대한 복기에서 나왔다고 문 대통령의 심중을 잘 아는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말했다(26~28쪽 기사 참조).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전략적 청사진이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전반적 기류가 한·미 관계 강화로 흐르고 있다. 미국의 힘을 지렛대로 북한 문제를 풀겠다는 시도로 해석한다. 외교·안보 전략의 주도권을 외교부 북미국 출신 관료들이 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관료 포획’의 위험에 대해서도 이번 정부 사람들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안으로는 국가의 힘을 예측 가능하도록 묶어놓는다. 밖으로는 국익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이 두 가지가 고전적인 국가의 임무에 해당한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는 새로운 차원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사회·경제 영역은 한때 확고한 민간의 영역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더 사회·경제 정책이 국가의 역할로 편입된다. 이 세 번째 차원이 더해진 것이, 고전적인 국가 모델과 현대 국가 모델의 중요한 차이다.

복지국가의 세계적 연구자인 G. 에스핑앤더슨은 현대사회가 노동력 상품화를 완성하면서, 국가가 적극적 사회·경제 정책을 펼 필요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2차 대전 이후 복지국가가 탄생한 이유다. 에스핑앤더슨은 2차 대전 이후의 복지국가를 자유주의형(영국·미국 등), 유럽 대륙 조합주의형(독일 등), 북유럽 사민주의형(스웨덴 등)으로 구분했다. 유형에 따라 노동시장의 조직 원리부터 복지체제까지 그 나라 사회·경제의 풍경이 달라진다.

노동시장을 어떻게 조직할지, 재정은 어떤 방식으로 투입할지, 의료와 주거와 빈곤과 실업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전적인 국가는 거의 고민하지 않던 숙제가 이제는 국가의 핵심 과제가 된다. 세 번째 차원 역시, 고전적인 두 차원과는 작동 원리도 게임의 법칙도 다르다. 세 번째 차원은 정부가 민간 참여자들의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설계하는 문제에 가깝다.

세 번째 차원에서, 문재인 정부는 대담한 실험 패키지를 들고 나왔다. 문재인 정부가 내건 소득주도 성장은 학계에서도 논란이 한창인 전략이다. 국가 단위에서 이 전략을 전면 채택한 전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수단 중 하나로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선택했다. 역시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급진적 실험이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도 의사 집단의 반발이 예상된다. 민간과 공공에 한 발씩을 걸치고 있는 한국 의료체제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건강보험 개혁 역시 중대한 실험이다. 민간의 의료 시스템이 어떻게 변할지, 공공 지출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두 예측하기 어렵다.  

통치의 세 차원이라는 렌즈로 보면, 문재인 정부의 100일을 구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제1차원이자 가장 기본 차원인 국가권력의 통제라는 과제에서, 문재인 정부가 제시하는 청사진과 방향성은 꽤 선명하고 확신에 차 있다. 최고 지도자의 열의와 경험도 충분히 입증되어 있다. 지난 대선의 화두 중 하나였던 ‘적폐 청산’이 바로 제1차원에서 결판난다. 적폐 청산이란 단순히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주역들을 단죄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든 권력기관이든 제 힘을 자의적으로 휘두를 수 없도록 구조적으로 제약하는 데서 완성된다. 2016년 겨울의 촛불집회는 유례가 없을 만큼의 대규모 군중이, 놀라울 정도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 붕괴와 집권세력 교체라는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한, 진정으로 특별한 변곡점이었다. 이 특별한 사건이 그것을 계승한 정권에 보편적 정통성을 부여한다.

국제정치에서의 이익 극대화라는 제2차원에서,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은 험난한 미래를 예고했다. 북한의 핵 능력은 참여정부 시절보다 훨씬 높아졌고, 핵심 파트너인 북한과 미국 정권의 예측 불가능성도 더 높아졌다. 안보를 강조하고 한·미 관계 강화를 지렛대로 쓰는 전략은 국내 정치에서는 일정 부분 효과를 보았다. 문재인 정부를 ‘친북 반미’로 낙인찍으려는 자유한국당의 공세가 대체로 헛발질로 끝나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이 호의적인 분위기로 마무리되면서 보수 언론의 공세도 누그러졌다. 하지만 한·미 관계 강화를 축으로 하는 접근법이 ‘대전략’인지 ‘임기응변’인지를 의심하는 전문가와 야당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는 점은 검토가 필요하다.  

제3차원인 사회·경제적 인센티브 설계 문제에서, 문재인 정부는 과감한 실험을 여럿 던지고 있다. 확고한 지지 기반이 없었다면 시도하기 힘든 실험이 연이어 등장했다. 일련의 실험을 납득하기 어려운 이들도 당장 지지를 철회하거나 대안으로 옮겨가기는 쉽지 않다. 제1차원에서 새 정부가 확보한 정통성이 강력한 반면 야당들은 거의 대안이 되기 어려운 구조라서다.

오석태 이코노미스트는 소득주도 성장, 최저임금 정책, 부동산 대책,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문재인 정부의 굵직한 의제에 날 선 비판을 가한다. 하지만 그는 대선 때나 지금이나 공개적인 문재인 정부 지지자다. 채상욱 애널리스트는 8·2 부동산 정책을 보며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이해하는지 의심하는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그는 “정치와 경제는 분리해서 보는 게 좋다고 믿는 20년 된 민주당 지지자”로 여전히 지지를 철회할 의사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78%(8월 2주차, 한국갤럽)로 여전히 매우 높다.

“소득주도 성장을 실행해볼 수 있는 유일국”

ⓒ연합뉴스7월27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주요 기업인들을 초청해 호프미팅을 갖고 국산 수제맥주로 건배했다.
ⓒ연합뉴스7월25일 문재인 대통령이 문무일 신임 검찰총장(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함께 걷고 있다.

문재인 정부 취임 100일은 제1차원에서 확보한 정통성 자산을 제3차원에다 쏟아붓듯 베팅을 한 시기였다. 분명 불확실한 도박이다. 하지만 이만한 도박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문재인 정부에 주어진 특수한 기회에 속한다. 김창환 캔자스 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소득주도 성장을 둘러싼 논란을 다루며 이렇게 썼다. “소득주도 성장이 검증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에 반대되는 이윤주도 성장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검증된 것 아닌가? 1997년의 IMF 사태(외환위기) 이후 20년간 진보·보수 정권 모두 이와 유사한 정책을 폈는데, 성장률은 낮아졌고, 분배는 악화되었다. 해봤는데 작동하지 않은 정책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여러 국제기구에서 소득주도 정책을 권고하지만 많은 국가에서 정책을 추진할 세력의 미비로 못하고 있다. 한국은 촛불혁명이라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체제 내 혁명’을 이룩하고 정권을 교체한 국가다. 전 세계에서 소득주도 정책을 실행해볼 수 유일한 국가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해서 문재인 정부는, 확신에 차고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 제1차원,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제2차원, 과감한 실험을 던지는 제3차원이라는 통치의 포트폴리오를 꾸렸다. 정권의 성패는,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 제3차원에서 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다. 이 인식은 청와대 인사들도 공유하고 있다. 적폐 청산에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은 먹고사는 문제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실패로 간주된다는 인식이다.

그럴 수 있다. 집권 후반기는 제3차원에 대한 유권자의 기대가 좌절로 바뀌면서 지지 기반이 무너지는 경로가 지금까지 보아온 전형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먹고사는 문제가 정권이 해야 할 모든 것이라고 평가할 이유는 없다. 2016 촛불집회와 박근혜 정권의 붕괴는 근본적으로 제1차원의 파산이 불러온 거대한 해일이었다. 제1차원은 너무나 기본적이어서 논외인 것처럼 간주되었지만, 실은 한국 사회가 제1차원의 숙제를 완전히 풀지 못했다는 사실을 박근혜 집권기는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제3차원이 먹고사는 문제라면, 제2차원은 국가와 국민의 생존 문제이고, 제1차원은 ‘국가의 최소한’에 해당한다. 셋은 모두 정권의 기본 과제다. 채점표를 따로따로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