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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톡방 성희롱에 공감해주는 자의 죄

양정민 (자유기고가)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8월 22일 화요일 제5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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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성감대 많음, 키 172㎝, B씨/가슴 큼…. 이걸 풀하고(공유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다.’ 30대 남성 기자 4명이 단톡방(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동료 여성들을 품평하며 나눈 대화 내용이다. 이미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지만, 이번 가해자는 전부 현직 기자라는 데서 오는 충격이 남다르다. 성폭력 사건을 취재하고 때로는 피해자를 직접 만날 수도 있는 직업군조차 이 정도로 왜곡된 성의식과 인권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니.

이번 사건을 비롯해 그동안의 단톡방 성희롱 사건을 종합해보면 행인은 물론 동급생·선후배·직장 동료, 심지어는 교수에 이르기까지 현실에서의 관계와 무관하게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평가의 도마 위에 오른다. 온몸을 조각조각 나누어 개인의 신체적 특성을 공유하고 성적 매력으로 순위를 매긴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인간이 아니라 ‘먹거나’ ‘배달’시킬 수 있는 음식에 자주 비유되기도 한다.

ⓒ정켈 그림
단톡방 성희롱의 또 다른 특징은 ‘강간 문화(Rape Culture)’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강간 문화는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 환경을 이르는 말로, 197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가해자에게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는 면죄부를 주거나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것을 일종의 ‘남자다움’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여기에 포함된다. 단톡방 안에서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성 경험을 자랑하고 여성의 신체를 희화화하는 일이 경쟁적으로 벌어지며, 동조하지 않는 동료 남성을 조롱하는 일도 모두 이 강간 문화에 딱 들어맞는 예다.

여성을 향한 성적 대상화와 강간 문화 옹호는 사실 카카오톡 채팅방이라는 장소만 빼놓는다면 매우 익숙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카카오톡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만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가해자들은 금방 휘발되는 ‘말’이라 여기고 내뱉지만, 피해자 처지에서는 단톡방 참가자들이 언제든지 지난 대화를 다시 볼 수 있고 누군가에게 쉽게 복사해서 전송할 수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톡방 성희롱 대부분은 몰카(몰래 카메라) 같은 다른 디지털 성범죄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난 1월 대학가에 단톡방 성희롱이 연이어 터져 나올 무렵, 한 대학의 익명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남자 소수만 있는 그룹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성희롱이) 계속되고 있다” “좋지 않은 발언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많은 남자들이 공감할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이만큼 가해자의 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글이 또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료 남성들의 역할


단톡방 성희롱이 처음 보도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관련 기사에는 ‘자연스러운 본능일 뿐’ ‘저 정도 대화를 하지 않는 단톡방이 있느냐’ ‘오히려 사생활 침해가 아니냐’라는 댓글이 따라붙는다. 단톡방 성희롱이 모욕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오고 있는 현실을 비추어볼 때, 이제라도 명예훼손이나 모욕이 아닌 범죄라는 인식을 명확히 해야 한다.

가해자가 성희롱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동료 남성들 사이에서 비난받고 소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동료 남성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호응해주거나 침묵하는 이들만 있다면 단톡방 성희롱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편러’로 몰리는 잠깐의 껄끄러움을 감수할 것인가, 혹은 성희롱 가해자의 공범으로 남을 것인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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