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낮잠을 즐기다가 햇빛에 눈이 부셔 깨어보니 학교 옥상. 뭔가 이상하다. 깜빡 잠이 든 사이 교복도, 선생님도, 교실도, 심지어 살던 집 주인까지 전부 바뀌어버렸다. 달력은 2005년에서 12년이 흘러 2017년 6월을 가리키고, 고등학생이던 친구들은 각자 직장에서 고단한 30대를 살아내고 있다. 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 속 성해성(여진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

12년의 시간을 오가는 해성 역에 배우 여진구를 섭외한 까닭을 두고, 제작진은 “해맑은 소년미와 의젓함을 두루 갖춰서”라고 설명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만이 아니라, 사실 여진구만큼 ‘타임 슬립’에 적합한 배우도 없을지 모른다. 그동안 그의 연기 인생에서 제 나이, 제 시간에 맞게 사는 인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홉 살에 데뷔한 이래 ‘아역 배우’ 여진구의 필모그래피는 주로 나이에 비해 숨이 가쁠 만큼 빠른 성장을 겪는 역할들로 채워졌다. 드라마 〈자이언트〉의 이강모(이범수 아역)는 길에서 어머니의 약값을 구걸하는 동생에게 “앞으로는 구걸을 해도 내가 하겠다”라고 소리치곤 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세자 이훤(김수현 아역)은 열다섯 나이에 이미 여론을 움직여 조정을 장악한 외척 세력을 압박할 줄 아는 영리함을 갖춘 이였다. 영화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 속 화이는 세상과 단절된 채 ‘살인 병기’로 키워졌지만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어른들에게 복수한 뒤 새 삶을 택한다.

ⓒ이우일 그림

열아홉 살, 성인을 눈앞에 둔 ‘배우’ 여진구는 이제 반대로 다소 더디게 성장하는 인물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내 심장을 쏴라〉 속 수명은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야 숨거나 견디지 않고 인생을 상대하겠노라 다짐한다. 같은 해 개봉한 영화 〈서부전선〉의 인민군 소년병 영광 역시 탱크 운전을 글로만 배운 탓에 실수를 연발하는 ‘허당’이다. 그리고 스무 살 여진구는 첫 영화 주연작으로 〈대립군〉의 세자 광해를 선택했다. 임진왜란 와중에도 자기 군사가 죽는 것보다 아끼던 책이 불타버린 게 더 속상한 철없는 세자를 변화시킨 건 남의 군역을 대신하러 온 대립군들이었다. 가족과 동료를 위해 목숨을 내건 이들과 함께하며 세자는 백성을 책임지는 군주로서의 덕목, 나아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덕목을 깨달아간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시간을 달리며 여러 배역을 살아내는 사이 현실 속 여진구의 시간은 착실히 제 박자대로 흘렀다. 영화 〈새드 무비〉 촬영장에서 정우성의 무릎에 앉아 떡꼬치를 받아먹던 꼬마는 이제 (정우성의 친구인) 이정재와 한 앵글에서 기 싸움을 벌여도 어색하지 않은 배우로 자라났다. 키가 자라면 시야가 넓어지듯, 마음이 자란 소년은 이제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화이〉로 트로피 7개를 거머쥐는 동안 “배우는 늘 도움을 받는 처지이다. 이 상은 스태프들을 대신해 받은 것이다”라며 쉽게 들뜨지 않았다.

종횡무진 시간을 달리면서도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배우

지난해에는 세월호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단원고 학생을 다룬 〈SBS 스페셜〉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내레이션 녹음을 마친 뒤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 잠시 엎드려 있던 여진구는 “(세월호 참사에 희생된 학생들과) 정말 딱 동갑이거든요”라며 ‘잊지 않겠다’는 말을 거듭 되뇌었다. 올해 5월 〈대립군〉 개봉에 즈음한 인터뷰에서는 “촬영 기간 내내 국민 모두 힘든 시기였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광해를 연기하면서 받은 위로가 관객에게도 전해지길 소망했다.

여진구의 차기작은 공교롭게도 영화 〈1987〉(하반기 개봉 예정)의 박종철 열사 역이다. 1997년생 배우가 2017년에 그려내는 1987년은 어떤 모습일까. 오히려 무언가를 덧붙이려 할수록 누가 될 것 같아서 담백하게 연기했다고 하니, 역시 종횡무진 시간을 달리면서도 자기 페이스를 지킬 줄 아는 영리한 배우라는 믿음이 확고해진다.

2017년 8월13일, 배우 여진구가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았다. 목소리만큼 울림이 있는 연기로 관객 곁에 오래오래 남아주기를 소망한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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