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비채 펴냄
어쩔 수 없이 온라인에서 책을 살 때도 있지만 더 선호하는 건 역시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는 일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북 디자인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젊은 동양화가 이현호씨의 작품 ‘신공촌’을 표지에 사용했다. 한지 위 수묵채색화로 그린 그림은 기꺼이 책에 뛰어들고 싶게 만드는 깊고 푸른 초록이었다.

기사를 쓸 때도 느끼지만 때로 디테일이 전부일 때가 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장면과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소한 장치를 차곡차곡 심어둔 글이 좋고,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이를테면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이런 대목이다.

무라이 건축사무소 사람들은 오전 9시면 전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 나이프를 손에 들고 연필을 깎는다. 주인공은 무라이 선생이 입사 선물로 직접 이름을 새겨준 오피넬 폴딩 나이프를 쓴다.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쓰는데 2㎝ 이하로 짧아진 연필은 매실주를 담그는 큰 유리병에 넣는다. 건축사무소의 여름 별장 난로 곁 선반에는 이러한 유리병이 일곱 개가 있다. 연필은 아침과 오후에만 깎는 게 암묵적 룰인데, 주인공은 하루 최대 열 자루 정도 연필을 쓰는 것이 일의 정확성은 물론 연필도 정성껏 다루는 방법임을 알게 된다.

연필 깎는 냄새는 마치 커피향처럼 아침을 깨우는 무언가가 있다고, 사각사각 소리는 귀의 전원을 켠다는 설명을 읽을 때에는 나도 매일 연필 깎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내가 독서용으로 쓰는 연필은 우더 쇼티 클러치펜슬로 심을 깎아 쓰는 게 아니라 교체해서 쓰는 방식이라 못내 아쉬웠다.

신입 건축가와 그의 스승이 보낸 1년 남짓의 시간을 담은 이 소설은 2013년 일본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작이다. 국내에는 지난해 여름 출간됐는데, 별다른 홍보 없이도 4쇄를 찍었다. 담백한 문장으로 적힌 글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삶과 잇닿아 있는 건축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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