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이때쯤이면 꼭 “휴가 다녀오셨어요?”라고 묻는 사람이 한둘씩 있다. 대답 대신 라스 폰 트리에가 연출한 영화 〈어둠 속의 댄서〉에 나오는 노래 가사를 변용해보겠다. “영국의 여왕님과 안데스 고산지대의 알파카를 보았냐고요? 여왕은 인간이고 산양은 동물이죠. 만리장성과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았냐고요? 지붕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모든 벽은 다 똑같고 물은 이미 보았으니 그걸로 됐죠. 에펠탑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보았냐고요? 첫 데이트 때 내 맥박은 그보다 더 높았답니다.” 독자들에게 책 네 권을 권한다. 

많은 소설이 연대기 형식의 구성을 취했듯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은 연표(年表)를 차용했다. 이 소설을 문제적 소설로 만들어준 힘은 모든 작가들이 획득하고자 하는 전형을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1982년에 태어난 김지영이 서른네 살의 ‘맘충’이 되는 과정은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벌레더라’라는 카프카 소설 속의 그레고리 잠자를 연상시킨다. 강경화·한비야·전여옥·공지영 같은 여성 명사들의 존재는 자칫 ‘성공한 여성’과 ‘페미니스트’를 등치해버림으로써, 일상 속에서 무수한 여성 차별의 파고를 대면해야 하는 평범한 여성들을 보이지 않게 한다. 흔한 대졸자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의 좌절을 그린 이 작품은 이 시대의 보편적 여성상을 보여준다.

김지영이 앓고 있는 병은 산후우울증처럼 보이지만, 이런 편협한 병명은 현대 여성을 모성을 저버린 악마로 낙인찍는다. 김지영이 앓는 병의 정확한 이름은 딸로, 연인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열심히 살았던 여성 주부에게 찾아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린 한국 문학사 속의 30대 여주인공들을 한데 모으면 아예 계보를 쓸 수 있을 정도이지만, 20대 여성은 아직 이 병을 모른다. 예컨대 김지영에게 “배불러 지하철 타고 돈 벌러 다니는 사람이 애는 어쩌자고 낳아?”라고 타박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여대생이었다. 진취적이고 야망이 드높은 20대 여성일수록 자신의 젠더를 억압한다. 여성이라는 것을 자인하면 이 사회의 낙오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에 그들은 그것을 되도록 지연하려 한다.

새 정권이 들어서고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 가운데 하나가 ‘적폐 청산’이다. 그러나 적폐 청산이 아무리 좋아도, 적폐보다 더 나은 정책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박인석의 〈건축이 바꾼다〉(마티, 2017)의 요지는 ‘건설의 시대에서 건축의 시대로’라는 구호에 담겨 있다. 책 제목에 지은이의 주장이 압축되어 있다. 건설(building)은 도로·교량·댐·터널을 짓는 토목공사를 가리키고, 건축(architecture)은 사람과 문화와 관계된 장소를 만든다. 아파트와 일반 주택을 비롯해 도서관이나 놀이터 같은 공공건물이 모두 건축에 속한다. 1990년대부터 건축계에서는 “양적 효율을 목표로 밀어붙이는 건설이 아니라, 매번 다른 고민을 하고 다른 결정을 해야 하는 건축적 방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는 문제의식이 나왔다.  

한국이 압축 성장을 하던 시절 토목은 국가의 기간사업 구실을 했으나, 건축 공사의 수주액이 토목보다 커진 지가 10년도 넘는다(아파트 공사를 통째로 뺐는데도 그렇다). 그런데도 건설 관련 법 제도와 행정 체계는 토목이 기준이다. 건축을 창의와 개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활동이 아니라 표준적·반복적 업무 처리를 미덕으로 하는 토목 활동으로 사고한 결과 대한민국의 도시와 공공건물은 미감도 개성도 없는 교복 같은 형태가 되어버렸다. 지은이는 건축에 삶의 질은 물론이고 고급 전문 인력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적 고부가가치가 있다고 역설한다.   

이노우에 히사시의 〈아버지와 살면〉(정은문고, 2017)은 원폭을 주제로 한 희곡이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생존자들은 원자폭탄을 ‘피카돈’이라고 불렀는데, 피카돈은 ‘피카(ピカ)=번쩍’과 ‘돈(ドン)=쾅’의 합성어다. 그들이 신무기의 정체를 알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원자폭탄을 ‘번쩍쾅’이라는 유아스러운 은어로 지칭하는 이유는 그 은어에 재현 불가능하고 전달 불가능한 압도적 재난을 즉물적으로 드러내는 효과가 있으면서도, 그 은어가 자신들의 잘못된 역사를 외면하고 싶은 유아적인 무의식을 동시에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재난의 생존자는 용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죽음과 같은 무기력과 자학에 시달린다.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희생자에게 투여되는 생의 동력(리비도·libido)을 재빨리 회수해 다른 대상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럴 때 프로이트는 ‘애도에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데리다는 프로이트와 달리 진정한 애도는 ‘애도에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성공한 애도가 떠난 자를 깔끔하게 또는 영영 잊어버리는 것이라면, 데리다의 실패한 애도는 떠난 사람을 가슴에 품는 것이다. 스물세 살 난 주인공 미쓰에가 결혼하기를 한사코 거부하면서, 원폭으로 죽은 아버지 다케조의 환영과 함께 사는 이유가 그것이다.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은 이제는 지겹다고 말하는 ‘망각 선동’에 맞서 우리가 세월호를 잊지 않고 더 잘 애도해야 하는 이유를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위고, 2017)에 담았다. 지은이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예수와 그의 사도들을 예로 들면서 서구 철학은 진리 상실의 슬픔에 대한 기나긴 애도의 절차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철학을 진리에 다가서도록 만드는 것은 슬픔이다.”

위정자들은 슬픔이 주권자(국민)들의 주목을 받고, 슬픔이 진리의 장소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매번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박종철), ‘도시 게릴라다’(용산참사), ‘교통사고다’ (세월호), ‘병사다’(백남기)라는 궤변으로 주권자의 슬픔을 억압하거나 호도하면서 슬픔을 신속하게 봉합하려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슬픔은 닫힌 세계를 열어젖히고, 더 나은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진리 효과를 창출한다. 박근혜와 김기춘이 을러댄 그 어떤 위협과 협박, 조롱, 감언이설과 이간질도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한 세월호 유족을 에워싸고 거대한 슬픔의 공동체가 조성되었고, 이들이 촛불의 일부가 되었다. 세월호를 잊지 않고 애도하는 방법은, 매년 자살을 선택하는 400명이 넘는 청소년, 불법 인간 취급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 성적 취향의 소수성으로 인해 배제당하는 이, 온갖 차별을 견뎌온 여성, 청년 실직자, 복지 없는 고령 노인 곁에 촛불을 켜는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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