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첫 주 ‘센 언니’는 단연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다. 부동산 시장을 뒤흔든 8·2 대책 발표를 전후해 전 국민의 관심이 김 장관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렸다. 8월2일 저녁 JTBC 〈뉴스룸〉에 출연했을 때는 네이버·다음의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휩쓸었다. 김 장관을 섭외하면서 손석희 앵커는 “〈뉴스룸〉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출연하는 현직 장관”이라고 말했다. 전 정권에서는 손 앵커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등의 이유로 현직 장관들이 출연을 기피했다고 한다.

ⓒ시사IN 조남진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서민들의 주거복지 정책을 가장 잘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김현미표’ 정책의 키워드는 ‘공공성 강화’다.
김 장관과 〈시사IN〉의 인터뷰는 그보다 열흘 전인 7월22일 진행됐다. 인터뷰 시간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부동산 대책 등 민감한 현안들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이라 장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뉴스가 될 수 있었다. 특히 국토교통부 대변인실이 곤혹스러워했다. “왜 특정 언론사와 먼저 인터뷰를 했느냐”라며 출입기자들의 집단 공격을 당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최대한 ‘현안’은 물어보지 않겠노라 약속하고 인터뷰를 잡았다. 어차피 ‘센 언니’ 시리즈는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를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진 터라 굳이 현안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쁜 시간을 되도록 피한다고 토요일 오전 1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45일을 끌어오던 추경안을 통과시키는 날이었건만, 정족수 부족으로 본회의가 자꾸 지연됐다. 정오가 막 지나 김 장관한테 문자가 왔다. “국회는 역시 버라이어티! 국무회의가 2시인데 배가 너무 고프니 밥 먹고 합시다.” 같이 대기하던 직원들이 바빠졌다. “그러지 말고 도시락 시켜 먹으며 인터뷰하시지요. 토요일에 문 연 식당도 많지 않고 왔다 갔다 시간만 축내지 싶네요.” 기자의 제안에 직원들 표정이 난감해졌다. 그동안 도시락 먹으며 인터뷰하는 장관을 모셔보지 못한 기색이었다. 김현미 장관은 흔쾌히 응했다. 도시락 인터뷰가 끝난 후 배석했던 국토부 대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장관님은 늘 이렇게 인터뷰를 하시나요? 사전 질문지도 없이?” 김 장관은 “이번은 살아온 얘기를 하는 거라 좀 특별한 케이스다”라며 웃어넘겼다. 부 창설 이래 첫 여성 장관에다 이전 장관들과 상당히 다른 스타일의 장관을 맞은 국토교통부 직원들이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을 받겠구나 싶었다. 

김현미 장관은 1987년 평화민주당의 말단 당직자로 시작해 3선 의원과 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정치 경력으로만 따지면 현재 정치권에 있는 어떤 여성보다 ‘선배’ 격이다. 김 장관의 정치 리더십 형성에 영향을 준 장면을 다섯 가지로 나눠 소개한다.  


텔레비전 모니터링의 교본을 만들다

연세대 운동권 출신으로 인천의 한 형광등 제조업체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김현미가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건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팀에 합류하면서다. 그해 6·29 선언과 함께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김 전 대통령이 비서실을 확대하면서 홍보 담당자로 채용했다. 얼마 후 평화민주당이 창당되면서 김 장관은 ‘평화민주당보’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김현미 ‘기자’의 주 업무는 대선 유세에 나선 김대중 후보를 쫓아 전국을 누비며 현장 연설을 녹취하고 일일이 풀어서 전달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매체가 다양하지 않은 데다 야당 후보의 발언은 크게 다뤄주지도 않아 현장에 오지 않은 이에게 김 전 대통령의 생각을 알리는 데는 당보의 역할이 컸다. 이때 푼 녹취록이 후에 〈김대중 연설문집〉으로 묶여 발간됐는데, 김 전 대통령은 김현미 기자에게 고맙다고 썼다. 이낙연 총리는 당시 전국을 함께 누비던 〈동아일보〉 출입기자였다.

김 장관은 당시를 “가슴에 작은 칼 하나를 심은 때”라고 회고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운동’만이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는데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을 반복해 듣고 정리하면서 정치가, 더 분명하게는 정권교체가 민주주의로 가는 유용한 길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언론분석팀이 꾸려졌다. 김현미 기획조정실 ‘부장’은 텔레비전 모니터 담당을 맡았다. 각 방송사의 메인 뉴스는 물론 자정 뉴스, 새벽 뉴스까지 일일이 모니터한 후 보고서를 만들어 곳곳에 뿌렸다. 당시 기획조정실장이었던 문희상 의원(전 국회부의장)은 “김대중 총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언론, 그중에서도 텔레비전이다. 그동안 선거에서 여러 번 진 게 텔레비전의 편파 보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라고 보기 때문이다”라며 뉴스 모니터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다. 각 후보별로 뉴스를 다룬 시간과 카메라 앵글, 보도 내용의 공정성까지 꼼꼼하게 정리한 보고서는 김 전 대통령과 당 지도부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이후 정치권의 언론 모니터 교본이 되다시피 했다. 

이 보고서는 매번 언론단체, 언론노조, 언론학자 등 700~800곳에 팩스로 뿌려졌다. 각 방송사 대표와 보도국장에게도 전달됐다. 출입기자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 사이에서 “김현미가 도대체 누구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한번은 김현미 부장이 기자실에 내려와 전날 뉴스 보도의 편파성을 지적하자 한 방송사 선임 기자가 “저 여자 누구야? 기자실에서 내보내!”라고 고함을 지르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초시계로 잰 기록까지 들이밀며 따지고 드는 김현미 부장을 논리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나중에는 기자들 사이에 “오늘은 김현미한테 책잡힐 일 없겠지?”라는 농이 오갈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언론사의 김대중 후보에 대한 보도 태도는 조금씩 달라졌다. 


‘김부’의 시대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6월21일 청와대에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맨 왼쪽은 김 장관의 어머니.

1997년 12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박선숙 부대변인이 당선자 부대변인으로 이동하면서 김현미 부장이 두 번째 여성 부대변인이 됐다. 지금이야 부대변인이 그리 중책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정당의 꽃’이라 불리는 요직 중 하나였다. 그 자리를 부국장, 국장급을 제치고 ‘부장’이 꿰찬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김부(부대변인)’란 별칭은 2003년 노무현 당선자 부대변인을 거쳐 청와대 언론비서관으로 들어가기까지 5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사이 대변인이 12명이나 바뀌었지만 ‘김부’는 한 자리에서 여당의 대(對)언론 관계를 주도했다. “그때는 경제지까지 합해도 신문이 10개 정도였다. 매일 신문과 주간지를 밑줄까지 쳐가며 열심히 읽었다. 정당은 온갖 정책과 민원이 모이는 곳이라 어느 한 주제라도 잘 모르고 있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미심쩍은 게 있으면 당 지도부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미리미리 취재해서 논평을 내놓았고 기자들이 뭘 물어봐도 대답할 수 있도록 백브리핑을 준비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고 출근도 누구보다 먼저 했다. 가끔 기사의 ‘각’을 잡지 못해 헤매던 기자들에게 슬쩍 던져준 ‘야마(핵심 주제를 뜻하는 언론계 은어)’가 기사화됐을 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자들 사이에서 ‘김부’의 최고 장점은 ‘야마’를 잘 잡는 거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붙여준 이도, 노무현 후보와 경쟁한 이회창 후보 측에 ‘원정 출산’이라는 낙인을 찍은 이도 ‘김부’였다. 새벽에 전화를 걸어온 기자가 “이회창 총재 아들이 하와이 가서 애를 낳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자 그는 잠결에 “(미국 시민권 얻고 병역 피하려는) 원정 출산이군”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했는데, 그 말이 히트하면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회복 불능이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김부’를 따로 불러 “김현미씨의 헌신과 열정에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김현미씨가 믿는 가치와 신념에 대한 헌신이라 봅니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친노’는 아니었지만, 지지율이 바닥을 기던 시절부터 자신을 밀착 수행하며 홍보와 방어를 적극적으로 해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런데 당선자 부대변인까지 했고, 당연히 노무현 청와대 초대 대변인이 되리라 여겨지던 ‘김부’가 아나운서 출신 영입 인사에게 밀렸다. 청와대 일부 참모가 “얼굴이 안 예쁘고 독해 보인다”며 반대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런 판단이 노무현 정부의 첫 행보를 상당 부분 꼬이게 만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물론 선거 캠프와도 아무 인연이 없었던 영입 대변인은, 써온 브리핑 말고 기자들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기 일쑤였다. ‘김부’가 언론비서관과 정무비서관을 지내고 청와대를 나올 때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고백했다. “처음에 김현미씨를 대변인으로 했어야 하는데 잘못한 것 같습니다.” 반면교사였을까? 문재인 청와대는 처음부터 “대변인은 무조건 정무 감각이 있는 사람을 쓰겠다”라고 강조했다.

국회 입성 그리고 낙선

당으로 돌아온 김 장관은 200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했다. 비례대표는 통상 공천권을 쥔 쪽에서 자기 사람을 심거나 각 계파별로 나눠먹기를 하는 식이었는데, 열린우리당 창당 직후 당 의장에 선출된 정동영 의장(현 국민의당 의원)은 비례대표도 외부 전문가들의 심사를 거쳐 후보군을 뽑고 공천 순서까지 정하도록 했다. 노무현 탄핵 역풍이 거셌던 당시 총선에서 김 장관은 비례대표 11번을 받아 당직자 출신 국회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오랜 ‘부대변인’ 직함을 벗고 집권 여당의 대변인과 경기도당 위원장 등을 맡아 동분서주했지만 2007년 대선 참패와 2008년 총선에서의 낙선으로 그는 한동안 침잠의 시간을 가졌다. “정권교체를 하고 국민의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는 동안 온몸을 던져 열심히 살았다. 아들 둘 돌볼 틈도 없이 매일 새벽 2~3시에 들어가고 몇 시간 쪽잠 자다 나와 또다시 논평 준비하고 의정 활동하고 야당과 싸우고. 그런데 낙선하고 보니 남은 게 스무 달 노력해 겨우 통과시킨 법안 하나(휴면예금을 사회 공익기금으로 전환토록 하는 법안)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주신 선물 두 개밖에 없더라. BBK 문제를 제기했다가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기소됐고, 뇌물 수수 의혹 관련해 기소를 당했다. 검찰 수사로 2년간 불려 다니고 결국 유죄까지 받아 더 이상 정치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비워졌다(김 장관은 2008년 옛 한보철강 인수에 실패한 업체에게 현금 15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지만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007년 대선 당시 김윤옥 여사가 고가 시계를 착용했다고 주장했다가 허위사실 유포 혐의가 인정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JTBC 뉴스룸 갈무리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8월2일 저녁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손석희 앵커와 대담을 나누었다.
이날 김 장관의 이름이 네이버와 다음의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휩쓸었다.

앞만 보고 살아왔던 김현미 ‘전 의원’은 “정치를 안 하면 뭘 하고 살아야 할까” 지인들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소박하게 사회적 역할을 하면서 살자”라고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한 일을 꼽자면 세 가지다. 하나는 2010년 지자체 선거 때 경기도 고양시에서 처음으로 야권연대(무지개연대)가 성사되는 데 힘을 보탠 것, ‘마트 아줌마’, ‘급식 아줌마’, 요양 보호사 등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네의 동년배 ‘아줌마’를 100명 이상 만나고 〈강한 아줌마〉라는 책을 쓴 것, 그리고 참여연대, 경제개혁연대 등에서 개설한 강의들을 쫓아다니며 금융, 노동, 복지 등 경제·사회 분야 공부를 한 것. 그때 만난 선생님이 김상조·홍종학·전성인·유종일·김연명 교수, 은수미 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등이다. 김 장관은 시민단체에서 들은 강의가 너무 유익하다고 판단해 우상호·이인영·김영춘 등 비슷한 처지의 ‘낙선 거사’들과 그룹을 만들어 2라운드 강의를 들었다. 당 공식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에도 요청해 더 많은 정치인이 듣는 세 번째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홍종학·은수미 ‘선생님’은 이후 동료 의원으로 다시 만났고, 김상조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공정거래위원장을 맡아 같은 배를 탄 동료가 되었다. 


상임위 짝꿍 문재인

김현미 장관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건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에서다. “요즘 청와대 F4라고들 열광하던데, 2003년에는 노무현(대통령)·문희상(비서실장)·유인태(정무수석) 같은 분이 청와대 얼굴이었고, 그 사이 가끔 잘생긴 분(문재인 민정수석)이 나타나 회의장의 외모 수준을 업그레이드해주곤 했다(웃음).”  

김 장관은 이른바 ‘친문’ 의원이 아니다. 2012년과 2017년 모두 문재인 후보 쪽에서 경선 때부터 도와달라고 했지만 ‘본선 후보가 되면 돕겠다’며 거절했다. 초선 의원 시절 당내 계파 싸움에 휘말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했다는 뼈아픈 반성 때문이다. 대신 본선에서는 두 번 다 방송 찬조연설 부문을 맡아 조국·윤여준·정혜신 등 신선한 연설자를 발굴하고 흡입력 있는 연설을 내보내는 데 전념했다.

그런 그가 국토교통부 장관으로 지명되자 많은 이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 해답은 국회상임위원회 ‘짝꿍’이다. 김 장관은 임명장을 주던 날 문 대통령이 한 말을 이렇게 소개했다. “2년 동안 김 의원이 기획재정위원회 간사를 맡아 일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참 잘한다 싶었다. 우리 당뿐 아니라 당시 새누리당 의원들을 상대해서도 상임위를 끌고 가는 능력이 뛰어났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당에서 주로 공보팀을 담당한 김 장관은 처음 상임위를 고를 때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김대중 정부 초기 외환위기 시절의 악몽을 떠올리며 경제 관련 상임위를 택했다. 당시는 경제가 모든 뉴스를 좌우하던 때였는데 당직자 가운데 경제 전문가가 드물어 대통령이나 경제부총리가 하는 얘기를 제대로 알아듣고 백브리핑 해주는 이가 없었다. 경제 기사와 자료들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이해하느라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는데, 그때 든 생각이 “경제를 모르면 정치도 제대로 못 하겠구나”였다. 그는 초선 때는 정무위 4년, 재선 때는 기재위 4년을 꼬박 채웠고, 3선이 되어서는 기재위 소속이면서 1년간 예결위원장을 맡아 나라 전체의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 들여다봤다.

“인사청문회 때 전문성이 없다며 호통치던 야당 의원이 많았는데, 그 의원들도 국토부 예산 따려고 애썼던 분들이다. 3선 때는 국토위 한번 해보려고 신청했다가 하도 신청자가 많아 못 들어갔는데, 이번에 국토위도 안 해봤다고 호통치는 의원들이 있길래 이름 적어놓았다(웃음). 기재위·예결위를 하며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큰 사업들을 얼추 파악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인준에 저항이 적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우상호 의원은 자기 덕에 내가 장관 됐다고 극구 주장한다. 원내대표 시절 예결위원장 시켜준 게 자기라며(웃음).”

최초의 여성 국토교통부 장관

ⓒ연합뉴스2004년 5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현미 의원과 포옹하고 있다.

장관이 된 후 그는 역지사지의 심정을 절감하고 있다. “장관, 국회의원, 지자체 단체장을 두루 해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국회의원이 최고라고 한다더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상임위원장 시절 장관들이 차관에게 맡기고 ‘잠시 이석(離席·자리를 비우다)하겠다’ 하면 ‘안 된다’며 붙잡아놓곤 했는데, 장관이 되어 12시간 가까이 앉아 있다 보니 나중엔 온몸이 퉁퉁 붓더라. 내가 지난겨울에 뭔 짓을 했는지 반성하는 중이다(웃음).”


게다가 장관이란 자리는 기본적으로 일정이 ‘빡셌다’. 청와대 회의, 국무조정 회의, 경제장관 회의 등 가야 할 회의만 하루에 서너 개이고 국회에 출석하는 날이면 딴 일정을 잡기가 어렵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세종시에 가서 업무를 봐야지 했는데 서울에 묶인 시간이 많아 결국 부처 직원들이 열차 타고 결재받으러 오는 경우가 잦아져 미안해하고 있다.  

바쁜 와중이지만 김 장관은 강호인·유일호·이용섭 등 전직 국토부 장관들을 만나 조언을 듣고 있다. 취임 초 몇 군데 현장을 다녀온 후에는 나름의 원칙도 세웠다. “‘장관님 행차입니다’ 이런 식의 현장 탐방은 역시나 현장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별로 안 되더라. 오히려 준비하는 사람들 힘들게만 하고. 장관이 거기 갔다는 것 자체로 메시지를 던지는 행사가 아닌 이상 사진 찍으려고 현장에 다니지는 않을 생각이다.”

김 장관은 그동안 대통령과 대선 후보들에게 이런 훈수를 두곤 했다. ‘임기 중에 다 하려고 하지 마라.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 한두 개에 집중해라. 나머지는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그러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는 이제 그 훈수를 자신에게 적용하려 한다.

가장 잘하고 싶은 건 서민들의 주거복지 정책이다. 대통령이 공약한 500개의 도시재생 사업을 섬세하게 진행하는 것이나, 복잡하고 통근 시간이 너무 긴 수도권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우선순위에 들어 있다. ‘김현미표’ 정책의 키워드는 ‘공공성 강화’다. “IMF 이후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 위주로 달려왔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다른 사람에게 편익을 주는 정책으로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공공성이란 이익을 좀 덜 내더라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피곤하고 지친 한 몸 누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이익이 우선이지’ 하는 저항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걸 잘 설득해 서민도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정책 얘기가 나오자 배석해 있던 대변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우리 대변인 걱정하시니 더 나가면 안 되겠다”라고 말한 김 장관은 “한 가지만 분명히 하고 싶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나는 정치 입문부터 똑똑하고 유명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평범한 당직자로 시작해 일이 맡겨질 때마다 최선을 다했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져 있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의 국토교통부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열심히 수행하려고 한다. 국토부가 담당하는 영역이 넓고 관련된 사람도 많아 이리저리 흔들려는 이들도 많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일관된 정책 방향을 유지하겠다. 그러고 나면 또 어느 순간 장관 김현미에 대한 평가가 나오겠지.”  

기자명 이숙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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