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백악관 측과 충돌했다. 공석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동아태) 차관보 자리를 둘러싼 인사 때문이다. 동아태 차관보는 ‘미국이 직면한 최대 현안’인 북핵 문제를 다루는 자리다. 틸러슨 국무장관은 동아태 차관보 대행을 수행해온 수전 손턴 부차관보를 추천했지만, 백악관의 반대에 부딪혔다. 손턴 부차관보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추진한 무역협정들에 찬성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손턴 부차관보의 대안으로 급부상 중인 재무부 차관보 출신 올린 웨딩턴 역시 TPP 찬성론자다. TPP 찬성론자라서 백악관이 제동을 걸었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할 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4월6일 미·중 정상회담 이후 100여 일이 지난 현재 북핵 문제가 풀리기는커녕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다. 당시 트럼프는 7월 초까지 100일 동안 중국에 기회를 줄 테니 북핵 문제를 해결해보라며 ‘외주’를 주었다. 중국이 못하면 곧바로 미국이 직접 나서겠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이 미·중 정상회담 전에 했던 얘기다. 그러나 북핵 문제는 꼬여만 가고 있다. 왜 그럴까?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때문일까? 김정은 위원장은 ‘상수’다. 북핵 문제가 꼬인 데는 미국 내 변수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이제 그 의문을 하나씩 풀어가 보자.

ⓒAP Photo
ⓒXinhua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위 사진 왼쪽)은 공석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자리에 수전 손턴 부차관보(아래)를 추천했지만 백악관의 반대에 부딪혔다.

지난 4월24일자 〈뉴욕타임스〉에 기사 하나가 실렸다. “트럼프 안보팀이 북핵 문제 해법으로 ‘동결 후 폐기’라는 2단계 전략을 검토하고 있다”라는 보도였다. 이 매체가 보도한 2단계 전략은 이렇다. 먼저 군사적·경제적 압박을 가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을 동결하고 무기 보유량을 줄인다. 그렇게 해서 생긴 기회(Opening)를 이용해 단계적으로 신뢰를 쌓아간 뒤 모든 무기를 포기하게 하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한다. 기존 북핵 해법인 비핵화론과 다른 것은 비핵화 이전에 중간 단계를 설정했다는 점이다. 바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그 상태에서 멈추는 동결 단계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들의 연구와 기밀정보 보고를 종합한 결과 이대로 가면 북한이 6~7주에 하나씩 핵폭탄을 만들어 트럼프 대통령 임기 말이면 파키스탄 핵 보유 수의 절반인 50여 개까지 확보하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맞다면, 비핵화를 장기적으로 추구하되 핵무기 수의 증가를 막는 동결이 당장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오바마 전 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실패하면서 북핵 동결론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기도 했다.

문제는 북한이 일정 기간 소규모의 위력적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고 미국은 그것을 ‘동의하지 않지만(Not accepting) 인정하는(Acknowledging)’ 상황을 견뎌야 한다는 점이다. 또 잘못하면 ‘핵탄두를 대형 미사일에 탑재하는 시간만 수년 늦추는 셈’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백악관이 ‘트럼프 안보팀’이라는 익명으로 2단계 전략을 언론에 흘려 여론의 반응을 살피려 했을 것이다. 이 같은 시도는 며칠이 안 돼 내부 반대에 부딪혔다. 바로 수전 손턴 부차관보 때문이다. 동아태 차관보가 공석이어서 북핵 문제는 사실상 손턴 부차관보가 주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핵 문제를 주도해온 손턴 동아태 부차관보

그런 손턴이 지난 4월27일 ‘민주주의수호재단(FDD)’이 워싱턴에서 주최한 북핵 간담회에 참석해 찬물을 끼얹었다. 그녀는 “미국이 유엔 안보리와 중국, 국제사회를 동원해 대대적인 대북 압박에 나설 것이다. (북한과 협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의향을 먼저 보고 싶지만 협상 비용을 북한에 지불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 또한 “핵동결은 비핵화를 위한 협상의 시작을 의미하면 모를까 중간 단계로 설정할 이유가 없고 보상을 지불할 이유도 없다”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이런 손턴의 주장은 새롭지 않다. 2012년 오바마 행정부 시절 ‘북한의 핵 활동 중단과 미국의 식량 지원을 맞바꾸’는 2·29 합의 실패 후 국무부가 견지해온 방침이다.

사실 북핵 동결론을 제일 먼저 꺼낸 이는 손턴 부차관보의 상관인 틸러슨 국무장관이었다. 4월9일 ABC 방송 인터뷰에서 틸러슨은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면 유의미한 협상에 착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으로 트럼프 정부가 북핵 동결론을 채택하는 신호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4월27일 그는 “동결에 대한 대가는 없고 비핵화를 위한 대화가 되어야 한다”라며 기존 발언을 뒤집었다. 5월1일 트럼프 대통령이 〈블룸버그〉와 인터뷰하면서 “적절한 상황이 되면 김정은을 만날 용의가 있다. 영광스럽게 그렇게 할 것이다”라며 대화론에 불을 지폈다. 5월3일 틸러슨 국무장관은 국무부 직원 설명회에서 “비핵화 결단을 해야 북한과 대화가 가능하다”라고 설명했다. 대통령과의 엇박자 발언에 이어 자신의 발언마저 뒤집어버린 틸러슨을 두고, 손턴 부차관보가 쓴 원고에만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기도 했다. “압박 강도를 높여 김정은이 비핵화 결심이 섰을 때 대화 테이블에 앉겠다” “협상 테이블로 가는 길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다. 대화 재개를 위한 인센티브도 제시하지 않겠다”라는 일련의 그의 발언은 평소 손턴 부차관보의 주장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지난 5월14일 북한은 중장거리 미사일 화성 12호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미사일 발사는 오슬로 북·미 회담 결과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국무부 안에서 ‘손턴 파워’를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5월9일자 〈교도통신〉에 따르면 미국은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면 그를 미국에 초청해 정상회담을 할 의향이 있다’는 트럼프의 제안을 중국을 통해 북한에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국무부, 즉 수전 손턴식으로 다듬어진 제안이었다. 틸러슨 국무장관이 국무부 직원들에게 밝힌 ‘국가체제 전환, 정권 붕괴, 남북통일 가속화’에 이어 ‘미군이 북한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것이 더해졌다. ‘대북정책과 관련한 4No 방침’으로 포장되어 북한에 전달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제안을 접한 중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4No 방침’이라고 하지만 전부 같은 뜻으로, 말장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미국에 ‘핵·미사일 개발 포기 대신 경제원조 실시’ ‘미국과의 적대 관계를 끝내기 위해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국교정상화 교섭 개시’ 등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미국의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다.

4월 말에서 5월 초에 벌어진 이런 일련의 상황이 북핵과 관련한 ‘100일 계획’의 성패를 좌우했다. 트럼프 안보팀이 제기한 ‘핵동결론’이 수전 손턴 부차관보가 장악한 국무부의 ‘비핵화론’에 묵살된 상태에서 5월8~9일 오슬로 북·미 대화가 열리면서 사달이 난 것이다. 지금도 노르웨이에서 열린 오슬로 북·미 대화의 정확한 내용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처음에는 미국의 민간 전문가들과 북한 외무성 당국자가 만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1.5트랙 대화로 여겨졌다. 미국 측 참석자 면면을 살펴보자. 먼저 수전 디매지오 뉴아메리카재단 국장은 이란 핵협상 전문가로 알려졌다. 특이하게 지난해 초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북측과 접촉하고 2월에 평양을 방문하는 등 막후 채널로 활동했다. 비록 전직이지만 단순 민간 채널이라 하기 어려운 중량급 인사들이 포진한 것도 이 회담이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 유엔 대사를 지낸 토머스 피커링 대사, 예비역 4성 출신인 월리엄 팰런 전 미국 태평양사령부 사령관, 핵협상 전문가인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 등이 그들이다. 게다가 현직인 조지프 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참석한 사실도 드러났다. 조지프 윤과 북한 측 대표인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은 지난 2월에 이어 두 번째 만남이었다. 오슬로 회담 뒤 조지프 윤이 6월12일 평양에 들어가 오토 웜비어를 데리고 나오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논의를 하려고 외교·군사 분야 고위급 인사들이 출동했을까?

ⓒ연합뉴스지난해 6월22일에 열린 동북아시아협력대화에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맨 왼쪽), 성 김 당시 국무부 6자회담 수석대표(왼쪽 다섯 번째) 등이 참석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오슬로 대화의 전사를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10월21~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북·미 대화가 열렸다. 미국 측에서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 특사, 조지프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 리언 시걸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 등 쟁쟁한 인사와 북한에서 한성렬 외무성 부상, 장일훈 유엔 북한대표부 차석 대사 등이 참석했다. 이 대화가 끝나고 나서 리언 시걸 박사는 “한두 차례 더 만나고 정부 간 대화를 권고하는 보고서를 제출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인 지난해 11월 중순 스위스 제네바에서 최선희 미국국장과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가 다시 만났다. 올해 3월 최선희 국장을 뉴욕으로 초청해 대화를 이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2월 김정남 암살 사건이 발생해 취소됐다가 4월 북핵 위기가 진정되면서 오슬로 대화로 이어진 것이다.


“미래의 핵무기 제조는 중단할 수도”

지난해 10월 말레이시아 대화의 연원은 2016년 4월 초부터 6월까지 진행된 북·미 군사대화 시도와 관련 있다. 2016년 2월17일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정의 동시 진행을 의미하는 ‘쌍중단’을 제안했다. 이후 중국은 북한 측과 3월 한 달간 핵동결·비핵화에 대한 중국 측 대가를 놓고 협상했다. 신의주 경제특구와 북·중 경협 심화가 주로 거론됐다고 한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북한의 요구 중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단과 평화협정 체결은 미국과 얘기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중재에 따른 북·미 군사대화가 시도되었다(〈시사IN〉 제451호 ‘리수용 외무상은 왜 미국에 갔을까’ 기사 참조). 당시 북측은 대화가 잘 되면 2000년 10월 조명록 총정치국장의 방미처럼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방미 이벤트를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 측이 두 달이나 시간을 끌다가 거부해 무산됐다. 당시 미국은 중국이 중재를 서는 게 걸렸다. 대화를 거부하던 북한이 군사대화에 관심을 보인 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독자 채널 구축의 기회를 엿보았고, 접촉이 이뤄졌다. 지난해 6월22일 최선희 국장과 성 김 당시 미국 국무부 6자회담 수석대표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에 참석했다. CNN의 조시 로긴 국제정치 분석가는 지난해 8월29일자 〈워싱턴포스트〉 기사에서 한 참석자의 말을 인용해 “최선희 국장은, 북한이 이미 만들어진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지만 미래의 핵무기 제조는 협상을 통해 중단할 수 있다는 태도를 표명했다. 이것이 북·미 접촉의 모티브가 됐다”라고 밝혔다.

ⓒ연합뉴스지난해 10월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북·미 대화에 참석한 장일훈 유엔 북한대표부 차석 대사(오른쪽)와 조지프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 대표.
ⓒ연합뉴스지난해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북·미 대화에 조엘 위트 연구원 (가운데)과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보가 참석했다.

지난해 10월 말레이시아 접촉은 오바마 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주도하고 국가정보국(DNI)이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특이하게도 국방부 쪽 인사들이 주도하고 국무부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군이 주도한 것은 이 회담이 4월 북·미 군사대화의 연장선으로 핵동결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국무부는 2·29 합의 실패 후 핵동결론을 반대하며 오로지 비핵화만 주장해왔다. 말레이시아 대화의 막후 실력자라 할 제임스 클래퍼 전 DNI 국장은 당시 “북한 비핵화는 이미 실패한 개념(Lost Cause)이다. 북한과의 핵협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는 북핵 능력 제한이겠지만 이를 위해서도 북한은 상당한 유인책을 요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지난 5월 오슬로 대화로 돌아가보자. “동결을 위해서도 상당한 유인책을 요구할 것이다”라는 클래퍼 전 국장 발언대로 북한은 이 회담에서 핵동결 대가로 미국에 미사용 핵 연료봉을 구매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 액수가 5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시사IN〉 제513호 ‘북한이 쏘아올린 핵동결이라는 미사일’ 기사 참조).

그런데 바로 직전 미국에서는 북한의 기대나 요구 수준과 매우 동떨어진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트럼프 정부 안보팀이 추진하려던 핵동결론에 제동이 걸리고 비핵화를 앞세운 수전 손턴 부차관보의 국무부가 속도를 낸 것이다. 그 기세로 오슬로 대화에서 북한 측과 부딪쳤다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5월14일 화성 12호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응수한 것은 전적으로 오슬로 회담 결과에 대한 불만 때문일 수 있다. 7월4일 화성 14호 발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 원인은 중국의 제재 약화가 아니라 미국에 있는 것이다. 백악관이 틸러슨 장관과의 정면충돌까지 불사하며 동아태 차관보 자리에 수전 손턴만은 안 된다고 ‘핀셋 비토’를 놓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