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윤이상 선생은 ‘원조 블랙리스트’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당시 그의 구명을 위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등 저명한 음악가 181명이 연명했다. 윤이상은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 건물 동판에 새겨진 위대한 음악가 44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44명 중 20세기 음악가는 윤이상을 포함해 단 네 명뿐이다. 현대음악의 거장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음악가였으나 한국에서는 신문 사회면에서나 드문드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람. 젊은 시절 항일운동을 했고, 그 누구보다 고향 통영을 사랑했던 선생은 1969년 독일로 추방된 후 한 번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1995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병상에서 이런 메모를 남겼다. 미완의 유언이었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고향의 귀중한 정서적인 기억을 온몸에 지닌 채, 그 정신과 예술적 기량을 담아 평생 작품을 써왔습니다. 통영의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지요. 고향에 가게 되면, 그때가 되면, 나는 통영의 흙에 입을 대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윤이상평화재단 제공고 윤이상 선생(왼쪽) 부부가 머물렀던 베를린하우스 복구를 위한 펀딩이 진행되고 있다.

‘주홍글씨’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선생은 죽어서도 블랙리스트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2005년 설립된 윤이상평화재단은 박근혜 정부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에서도 ‘윤이상 방북’이라는 메모가 남아 있었다. 유네스코 산하의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에 가입한 한국의 첫 국제 콩쿠르인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도 정부 지원 중단으로 무산될 뻔했다가 박근혜 탄핵 이후 가까스로 예산을 배정받았다.


2017년은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다. 지지부진했던 재단의 윤이상 복권 사업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선생이 생전에 머물며 수많은 곡을 썼던 베를린하우스를 재정비하기 위해 윤이상평화재단이 진행하는 카카오 스토리펀딩이 대표적이다. 실질적으로 돈을 모으겠다는 목표도 있지만,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됐다. 목표 금액도 1000만원으로 낮게 잡았다. 유희열·황석영·권해효 등이 지원 사격에 나섰지만 펀딩 진행 속도는 신통찮았다.

관심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됐다. 7월5일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윤이상’이 올랐다. 김정숙 여사가 독일 가토우 공원묘지에 안치된 윤이상 선생 묘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김 여사는 이념 논란에 빛바랜 윤이상 음악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다. “윤이상 선생이 생전 일본에서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 오셨는데 정작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 그분의 마음이 어땠을까, 무엇을 생각했을까…. 저도 통영에 가면 동백나무 꽃이 참 좋았는데, 조국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선생을 위해 고향의 동백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가져오게 됐다.”

청와대 요청으로 적당한 크기의 동백나무 묘목을 찾아다닌 통영시청도, 윤이상평화재단 측도 전혀 몰랐던 ‘빅 이벤트’였다. 이날 김 여사는 윤 선생의 베를린 자택 복원사업에 대해서도 “노력해보겠다”라고 답했다.

힘은 얻었지만 그렇다고 윤이상평화재단 사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탁무권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은 7월19일 사비를 털어 건축 전문가 두 사람을 독일 베를린으로 보냈다. 방치되어 있던 집을 정비하기 위해서다. 독일의 국제윤이상협회 측에서 간간이 관리를 해주긴 했지만, 주인 잃은 집은 여기저기 상해 있었다. 지난해 5월 이사장직을 맡은 이후로 재단이 해온 일은 탁 이사장의 주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스러워서…. 9월17일이 선생 100주년인데 베를린하우스에서 오픈 세리머니를 열려면 좀 늦었죠.”

베를린하우스에 내 이름 새겨볼까

사실 탁 이사장은 윤이상 선생과 별다른 인연이 없다. 이사장직을 제안받았을 때도 여러 번 고사했다. 자신마저 거절하면 재단이 문 닫을 수도 있다는 얘기 때문에 결국 수락했다. 윤이상과 탁 이사장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 역시 ‘주홍글씨’를 평생 안고 사는 사람이라는 점 정도일까. 대학 시절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던 탁 이사장은 예전 이야기를 꺼내자 손사래를 쳤다. “한국 사회는 주홍글씨 새기는 걸 좋아해서, 난 평생 남민전이고 빨갱이죠(웃음). 주위에서 그렇게 규정해버리니까.”

ⓒ시사IN 조남진탁무권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위)은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여러 기념사업을 진행 중이다.

학생운동으로 많은 동료들이 망가졌고, 살아남은 동료 중 몇은 정치권으로 갔다. 김근태와 이학영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이재오 같은 사람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제적됐고,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탁 이사장은 출판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도 1983년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에 관여했다.


서울 상계동에서 노원문고라는 이름으로 서점을 시작한 건 1994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점은 사양 산업이라고 했지만, 탁 이사장은 망해가는 서점을 인수해 하나씩 늘려갔다. 노원에만 매장이 다섯 개 있고, 연신내문고와 신촌 문구점도 운영하고 있다. “따지자면 내 직업은 ‘재건업자’인가 봐”라는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첫해를 제외하고는 23년째인 지금까지 매년 흑자를 냈다. 직원도 60명이나 된다.

서점은 생계 수단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공간 운동의 거점이다. 올해 초 노원역 인근에 “서점의 2단계 진화 형태”인 복합문화공간 ‘더숲’을 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숲은 200평 규모에 서점·갤러리·영화관·카페·공연 공간을 겸하고 있다. 노원구 인구가 60만명인데 미술관 하나 없다는 게 영 신경이 쓰였다. 독립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굳이 시내로 나가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공간이 사람을 만들어요. 사람의 의식까지는 아니지만 정서를 결정하는 큰 요인이거든요. 영화나 음악이나 미술이나 ‘쓸데없어 보이는 일’이 모여서 사람을 키우는 거 아닐까.”

더숲은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이것만은 적자를 볼 게 분명했다. 전체 직원회의를 열었다. “내가 사장이긴 하지만, 직원들이 돈을 벌어주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이 벌어준 돈으로 이런 걸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죠. 근데 오히려 직원들이 과감하게 시도해보는 게 좋다고 하는 거야.”

탁 이사장은 더숲이 청년·청소년들이 와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다. 노원문고를 운영하면서 지역의 여러 사업에 이름을 올리고 돈을 보탠 것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노원교육복지재단은 2016년 3월 전국 최초로 청년수당을 지급했다. 정부와 시가 청년수당을 놓고 반목하고 있던 때, 민간 자금을 활용한 최초의 사례였다.

더숲은 윤이상을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기도 하다. 탁 이사장은 8월15일까지 진행하는 카카오 스토리펀딩 ‘한국이 외면한 천재 작곡가 윤이상’의 리워드로 더숲 카페에서 판매하는 커피 쿠폰과 더숲 아트시네마 영화관람권을 준비했다. 10만원 이상을 후원하면 베를린하우스 리모델링을 마친 후 이용할 수 있는 1박 숙박권을 제공하고, 동판에 이름도 새겨줄 예정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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