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한 영국 언론인이 남긴 ‘의병’ 사진

1907년 F. A. 매켄지는 항일 의병을 취재하기 위해 충청북도 제천과 강원도 원주 일대를 수소문했다. 그는 결의에 찬 의병의 사진을 찍어 역사에 남겼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8월 03일 목요일 제515호
댓글 0

<80일간의 세계일주>(쥘 베른, 1872)가 가능해진 19세기 말, 그리고 조선이 오랜 쇄국의 담을 허물고 문호를 개방한 이후 많은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흔적을 남기게 됐다. 그 가운데에는 한국인이 무색할 만큼 이 땅을 사랑하고,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애쓴 외국인도 있었어. 오늘부터 그분들의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고자 해.

국사 시간에 <대한매일신보>와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의 이름은 배웠을 거야. 19세기 말 영국은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 당시 영국의 주적은 발칸 반도에서 인도를 거쳐 극동에 이르기까지 남하 정책을 펴온 러시아였지. 일본은 영국의 전략적 파트너였어. 영국인 베델은 일본에 와서 무역업에 종사하며 16년을 살았는데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어. 그러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진다.

이 전쟁은 전 세계의 관심을 끌어. 베델은 영국의 <데일리 크로니클>이라는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돼. 그가 처음으로 보낸 기사는 ‘경운궁(덕수궁) 화재 사건’이었어. 여기서 그는 이 화재가 일본군의 방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강력히 시사하는 바람에 해고되고 말아.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 언론은 그 위상에 걸맞은 친일적인 기사를 요구했거든.

그는 한국에 영자 신문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영자 신문 사업을 구상했어. 그러려면 영어에 능통한 한국인이 필요했지. 독립협회 회원 출신으로 미국 생활도 경험하고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기도 했던 양기탁은 안성맞춤의 파트너였어. 둘은 영자 신문을 만드는 한편 한국인들을 위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는 데에도 의기투합했지.

ⓒ베델선생기념사업회 갈무리
구한말 대표 정론지였던 <대한매일신보>와 이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멸망해가는 대한제국의 암울함을 밝히는 횃불 같은 존재로 솟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맺어진 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울분에 찬 명문을 남긴 건 알고 있지? 당일 장지연은 연행됐고 <황성신문>은 정간됐다. 그 살벌한 때에 “실로 대한 전국 사회 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 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하리로다. 오호라 황성 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한국 근대사 산책> 4, 강준만, 인물과사상사)라고 극찬하며 호외를 발행해 을사늑약을 폭로한 게 바로 <대한매일신보>였어. 또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한 뒤 우리나라 최초의 ‘의견 광고’를 싣는 등, 대서특필하며 서울 시민들이 민영환 집으로 몰려가 대성통곡하게 만들었지.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나 국채보상운동 등도 앞장서서 보도했다.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는 “내 말 백 마디보다 신문의 한마디가 한국인들을 더 격동시킨다”라고 토로할 만큼 <대한매일신보>는 야무지게 일제의 침탈에 맞서게 돼.


그 중심에 베델이 있었어. “나는 일본의 동맹국 영국인”임을 내세우면서 신문사 앞에 ‘일본인 출입금지’까지 내걸고 신문을 만드는 베델이 일본에게 얼마나 눈엣가시였을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베델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던 일본은 결국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게 돼. 마침내 영국 법정에 고발된 그의 죄명은 ‘치안방해 선동죄’였어. 증거물로 제출된 것 중 하나는 <대한매일신보>의 의병(義兵) 관련 기사였단다. 당시 여러 한국 신문조차 의병을 ‘비도(匪徒·떼도둑)’라고 부르며 비난했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의병’ 호칭을 썼다. 특히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에는 더욱 활발히 보도했거든. 1907년 9월24일자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대한매일신보> 영문판)에는 ‘바로 최근에 현장에서 돌아왔으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통신원’이 전하는 의병 관련 기사가 실려 있어. 이 통신원은 F. A. 매켄지라는 영국 언론인이었어.

1907년 초가을 매켄지는 일본 통치에 저항하고 있다는 무장 집단 ‘의병’을 취재하기 위해 충청북도 제천, 강원도 원주 일대를 돌아다녔어. 일본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치를 떨면서, 또 보이지 않는 의병들을 찾아 다니느라 애를 태우던 매켄지 앞에 심부름꾼 소년이 호들갑을 떨며 뛰어든다. “의병들입니다!” 마침내 나타난 초라한 입성의, 그러나 그 결연함만은 어느 나라 군대에도 뒤지지 않는 의병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복을 입은 지휘관 격의 젊은이는 일본을 이길 것 같으냐는 매켄지의 질문에 흔쾌히 대답했어.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덤비는 싸움은 슬픈 싸움이야. 그러나 이길 수 없음을 알고 포기하는 이에게 기다리는 것은 노예의 삶일 뿐이었지. 제국주의 시대를 살던 매켄지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거야. 문득 숙연해졌을 매켄지에게 군복 입은 의병은 절절하게 부탁했다고 해. “우리는 무기가 없습니다. 외국인인 당신은 일본군의 간섭을 받지 않고 아무 곳이나 갈 수 있을 테니 우리에게 무기를 사주십시오. 사례는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돈이 있었겠니.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겠다”

매켄지는 낡아서 쓸 수조차 없고 화약도 떨어진 처지로 ‘앞에 총’을 하고서 결의에 찬 의병들을 사진으로 찍어 영원히 역사에 남기지. 대한제국 의병이 수만명에 달했다고 하나 그 전의(戰意)를 불태우는 모습으로는 거의 유일한 사진. 그 속에서 이름도 없고 어디 출신인지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의병들은 남루하지만 당당하고 슬프지만 자신만만해 보인다. 이런 매켄지의 의병 취재를 신문에 싣고 그 때문에 ‘치안방해 선동죄’로 유죄를 받아 옥고를 치른 베델은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고 1909년 5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돼.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해 한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의병박물관 제공
1907년 <대한매일신보>의 통신원 F. A. 매켄지가 찍은 구한말 의병들의 사진.

베델은 왜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국을 사랑했을까? 매켄지는 왜 한국의 독립 투쟁에 관심을 가졌을까? 한국 사람들이 불쌍해서? 일본이 미워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매켄지의 회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봐.   


“그들은 매우 측은하게 보였다. 전혀 희망이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몇몇 군인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엾게만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아마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보여주는 표현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자기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한국의 독립운동>, 매켄지, 1920).”

그들은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유약하게 굴복하지만은 않았던, 스스로의 자유와 자존을 위해 싸울 줄 알았던 한국인들을 발견했던 게 아닐까. ‘가엾게만 생각했던’ 동정을 넘어 기꺼이 한국인들과 연대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던 게 아닐까.

<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