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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하나로 일본 내각을 사퇴시킨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은 20세기 최고 연설가로 꼽힌다. 하지만 지주와 자본가를 아우르고 농민과 노동자를 포용하려 했던 그의 삶은 ‘좌익’으로 몰렸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7월 26일 수요일 제5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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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명연설가로 유명했다. 1992년 그가 세 번째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유세를 구경한 적이 있어. 예의 그 명연설이 끝난 후 한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열렬하게 박수를 치면서 이렇게 부르짖더구나. “몽양 이후 최고다.”

‘몽양(夢陽)’이란 지금부터 꼭 70년 전인 1947년 7월19일 혜화동로터리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괴한의 총에 맞아 숨진, 한 걸출한 독립운동가이자 노련한 정치인이었던 여운형 선생의 아호야. 또 대중 연설에 관한 한 20세기를 통틀어 으뜸으로 꼽히는 분이었다. 그 파란만장한 행적에 비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구나.

이 뛰어난 대중연설가 여운형의 삶을 결정한 것 또한 누군가의 피 끓는 연설이었어. 도산 안창호가 그 주인공이었지. 1907년 안창호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애국 연설회를 가졌는데 호응이 대단했다고 해. 여운형과 그의 동생 여운홍도 안창호의 연설을 들으며 다짐한 사람들 중 하나였어.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건국준비위원회 시절 몽양 여운형 선생이 연설하는 장면.

여운형 역시 안창호를 본받아 길거리에서 구국의 뜻을 담은 열정적인 연설을 하게 된다. 연설 도중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 보는 사람들도 엉엉 울어버렸을 만큼 연설을 잘했다고 해. 한번은 고향 양평에서 연설을 했는데 말 타고 지나던 양평군수가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대 말을 듣고 보니 느낀 바가 크다. 오늘로 일진회(친일 단체)를 그만두겠다”라고 다짐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지.


연설이란 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설득력과 통찰력, 그리고 풍부한 교양까지 갖춰야 하는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단 아래에서 그 달변을 뒷받침할 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일 거야. 자기의 말만큼이나 행동할 수 있는가 여부지. 여운형은 그 능력과 용기를 두루 갖춘 사람이었어.

전자책 <여운형 수필집>(알바룩스 출판사, 2017)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보자. 외국 방문을 위해 항해에 나선 여운형의 일행인 중국인 청년이 영국인과 시비가 붙어. 여운형은 “불량배와 싸우지 말라”고 (영어로) 외쳤고 이에 발끈한 영국인에게 결투를 제의하지. “칼 가지고 싸우든 총 가지고 싸우든 주먹으로 싸우든 네 마음대로 하자.” 그러고는 ‘짧은 바지에 소매 짧은 와이셔츠를 입고 싸움에 경쾌하도록’ 옷을 입고 갑판으로 나와. 영국인이 그 기세에 눌려서 꽁무니를 빼려 했어. 그때 여운형은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지. “동양인은 거짓말을 아니 한다. 영국놈같이 비신사적이 아니다!”

때는 명백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제국주의 시대. 서양인들은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판을 치고 있었고 대놓고 아시아인들을 무시했지. 아마 그 배에도 수많은 인도인·중국인·필리핀인이 타고 있었을 거야. 그들이 저 여운형의 한마디에 열광했을 것임은 아빠가 보지 않아도 안다. 머리 하나는 더 컸을 백인을 때려주겠다고 반팔에 반바지 입고 나타난 동양인. “우리는 거짓말 안 해!”라는 일갈과 더불어 ‘신사의 나라’라는 다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자부심에 그득했던 영국인을 향한 화살 같은 한마디, “영국인들처럼 비겁하지 않아”. 아마 그들은 길거리에서 여운형의 연설을 들었던 조선인들처럼 각자의 말로 부르짖었을 거다. “옳소!” 바로 그게 여운형의 힘이었지.

해외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에 분주하던 1919년 여운형은 아주 특별한 초대장을 받아. ‘원수로부터의 초대’라고나 할까. 바로 일본 정부가 보낸 것이었지. 임시정부 외무차장을 지낸 그를 초대한 것은 임시정부 내부의 분열을 꾀하려는 술책이었어. 즉 ‘조선인 교화’를 목적으로 상대적으로 온건한 독립운동가였던 여운형을 꼬드기려고 했던 거지. 우여곡절 끝에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 서른네 살 여운형은 ‘국빈’ 자격으로 일본 제국호텔의 붉은 카펫 깔린 연단에 서게 돼. 여운형은 여기서 다시 한번 그 특유의 명연설을 펼쳤지.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이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입니다. 일본 정부에게 이를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겠습니까.” 3·1항쟁의 생생한 기억과 독립의 신념에 그득한 여운형의 사자후는 한국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인들의 마음도 헤집어놓았어. 임시정부 내에 혼란을 일으키려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헛갈려버리고 말아. “어떻게 저런 불령선인을 초대해서 저런 명연설로 우리 일본에 먹칠을 할 수 있스므니까!” 항의가 속출하면서 일본의 하라 내각이 총사퇴하는 계기가 되니까.

열 번 테러를 겪고 결국 괴한의 총에 맞아

ⓒ시사IN 조남진
2016년 7월19일 서울 우이동 묘소에서 열린 몽양 여운형 69주기 추도식.

백년같이 길었던 일제강점기 35년이 갔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뒤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며 해방 직전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밀리에 꾸려온 여운형은 해방 다음 날인 1945년 8월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감격적인 연설을 해. “우리 민족 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합리’와 ‘이상’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샀어. 이유는 역시 그의 연설을 더 들어보아야 할 것 같구나.


“해방된 오늘, 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농민, 노동자들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일제 통치 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됩니다.”

지주와 자본가들이 좋아할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나 노동자·농민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미움을 살 연설이었지. “저 빨갱이!”라는 저주와 “저 반동분자!”라는 욕설을 동시에 들었던 여운형은 해방 이후 무려 10번이나 테러를 당하고 집까지 폭파되는 참극을 겪었어. 좌익과 우익의 극단적인 충돌 와중에 그 양쪽을 아우르려 했던 여운형은 양쪽의 적이 됐던 거야. 구사일생 극적으로 목숨을 보전했지만 끝내 암살범의 총알을 맞고 말았어.

그의 죽음 이후 지속된 동족 간 충돌과 전쟁, 냉전의 세월에서 여운형의 삶은 시나브로 지워져갔어. 분단된 남쪽 조국에서 그의 삶은 ‘좌익’으로 몰렸지. 오히려 가장 진솔한 평가는 외국인에게서 나왔어. “여운형이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 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 편이었다(미국 군정청 장교 리처드 로빈슨).”

총을 맞은 뒤 여운형이 마지막으로 흘린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다고 해. 네가 알다시피 ‘조국’과 ‘조선’은 지금도 갈라져 있구나. 남이건 북이건 자신에게 반하는 세력은 불구대천의 원수같이 몰아붙이는 극단의 세월 속에 여태껏 살고 있구나. 그래서 아빠는 더욱 여운형의 사자후가 그립다. 이렇게 싸우지 말고, 당신들만 옳다고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고 부르짖던 목소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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