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관저 백악관 서쪽에 위치한 건물을 일컫는 웨스트 윙(West Wing). 대통령 집무실은 물론 각료실·상황실·비서실 등이 포진한 일종의 ‘행정동’인 이곳에 대통령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수백명이 근무한다. 〈웨스트 윙〉이라는 정치 드라마로 더 유명해진 이곳이 최근 세간의 관심을 부쩍 끌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비서들 간 권력투쟁 때문이다.

극우 성향의 백악관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 국내정책 담당 선임고문 스티븐 밀러 등 ‘국수파’ 인사들과 개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백악관 선임고문 재러드 쿠슈너(트럼프의 사위) 등 ‘국제파’ 참모들이 ‘트럼프의 마음’을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 유력 문화 월간지 〈배니티 페어〉가 “웨스트 윙에서 배넌과 쿠슈너 간의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국수파’ 혹은 ‘국제파’라는 용어는 해당 인사들의 이념적 성향과 세계관을 두고 주요 언론이 지어낸 것이다. 이들의 이념적 분기점은 △미국의 대외 개입 △무역협정 △이민 등 3대 의제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갈린다. 즉 ‘국제기관과 국제협정을 포함, 대외 문제에 미국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 ‘무역협정은 일반적으로 미국에 좋은 것이니 더욱 확대해야 한다’ ‘이민 역시 미국에 좋은 것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면 국제파라고 할 수 있다. 전임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 공화당 부시 대통령 등 역대 행정부는 당파를 떠나 자유무역과 대외 개입, 이민을 지지했기 때문에 국제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난 대선 때 트럼프는 세 가지를 모두 반대했다.

ⓒEPA7월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왼쪽)이 G20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한 모습.

트럼프는 △반이민 △반자유무역 △대외 분쟁 불개입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보수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어 당선됐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미국 우선주의’를 천명하는 등 국수적 노선으로 일관했다. 트럼프주의로 대변되는 이런 국수적 노선에 편승해 재미를 톡톡히 본 세력이 국수파다. 특히 극우 온라인 매체 〈브레이트바트〉 대표를 지낸 국수파 리더 배넌은 일약 백악관 수석전략가 자리에 올랐다. 그는 트럼프의 국정 기조를 좌지우지하면서 ‘그림자 대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트럼프가 취임 직후인 1월 하순 배넌을 외교·안보 수장들이 참석하는 국가안보회의(NSC)의 고정 멤버로 포함하면서 배넌을 중심으로 한 국수파의 파워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실제 트럼프가 취임 후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무슬림 입국 금지를 포함한 일련의 국수적 조치들을 발표한 데서 이들의 입김이 강하게 드러난다. 배넌은 백악관 자신의 사무실 벽에 트럼프가 대선 때 내놓은 공약 목록을 걸어놓고, 역대 행정부의 국제파 정책들을 허무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승승장구하던 국수파는 4월 들어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우선 트럼프가 배넌을 NSC에서 전격 배제해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배넌에 대해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 중 하나”라며 공개적으로 깎아내리는 한편 그와 암투 중인 사위 쿠슈너에게 힘을 실어줬다. 배넌의 백악관 퇴진이 시간문제라는 관측이 나돈 것도 그즈음이다.

배넌의 추락과 동시에 트럼프가 일련의 국수주의적 공약에서 뒷걸음질하면서 국수파의 위세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트럼프 대통령은 당초 약속과 달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폐기에서 재협상으로 이동했다. 개리 콘 NEC 위원장은 자유무역협정을 파기하면 결국 세계 전체가 파국적 무역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며 트럼프를 설득했다. 지난 3월 〈파이낸셜 타임스〉는 콘의 진언이 통하면서 백악관 내 국수적 경제학자인 피터 나바로 국가무역위원장의 입지가 좁아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4월 이후 국수파 기 꺾이고 국제파 승승장구

국제파의 성과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중국에 ‘환율 조작국’ 딱지를 붙이려던 계획도 철회했다. 트럼프는 ‘대외 분쟁 개입 반대’의 기조를 포기한 듯, 반군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한 시리아 정부군을 전격 공습해서 국제파에게 힘을 실어줬다. 또한 트럼프는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통해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다짐했다. 트럼프는 후보 시절 유럽 국가들이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하지 않으면 나토에서 탈퇴하겠다는 등 위협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AFP PHOTO2017년 1월22일 백악관 참모 취임식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오른쪽)를 축하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파 쪽으로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위 쿠슈너로 상징되는 국제파 ‘가족 군단’ 덕분이다. 쿠슈너는 지난 대선 때 트럼프의 디지털 유세를 지원하면서 장인에게 환심을 샀다. 선거 이후 트럼프는 쿠슈너를 선임고문이란 직함으로 백악관에 입성시켜 사실상의 ‘최고 실세’로 만들었다. 쿠슈너의 아내 이방카는 전직 모델에 사업가 출신으로 부친의 신임이 무척 두텁다. 그녀는 지난 3월 무급을 조건으로 ‘백악관 고문’이란 직함을 단 뒤 부친에게 다방면에 걸쳐 조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타워가 있는 뉴욕에 거처를 두고 활동해온 쿠슈너와 이방카는 뉴욕 소재 골드만삭스 출신인 콘 NEC 위원장, 파월 국가안보 부보좌관과 함께 ‘뉴욕파 고문’이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이들 4인방은 진보적 성향의 뉴요커답게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한 세계무역 질서의 개편을 원치 않을 뿐 아니라 나토와 국제기구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 공약을 적극 찬성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수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방문을 계기로 다시 국수파 성향의 발언을 쏟아냈다. 7월8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차 유럽 순방에 나선 트럼프는 강력한 국경과 민족적 정체성의 필요성을 주창한 국수파 배넌과 밀러의 견해를 반영해 연설했다. 특히 나토를 지지한다면서도 유럽 국가들의 방위비 추가 부담이 필요하다고 압박했다. 무엇보다 국수파의 지론인 ‘미국의 기후변화협약 탈퇴’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미국 무역대표부가 한국에 대해 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공식 요구한 것에도 배넌과 밀러 같은 국수파 인사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국제파 노선을 견지하던 트럼프가 다시 국수파로 회귀한 것이다.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은 〈폴리티코〉와 한 인터뷰에서 “전반적으로 보면 트럼프의 유럽 순방은 국제주의보다는 국수적인 경향을 더 표출했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향후 이민·무역협정 같은 의제에서 배넌과 밀러가 어떤 역할을 맡느냐에 따라 국수파의 승패가 결정되리라 본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향후 10년간 합법적인 이민자 수를 50만명으로 대폭 제한하려는 밀러 고문에게 전폭적인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다른 분야는 몰라도 자신의 대선 공약인 이민 문제만은 국수파를 지지하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반면 국제파의 승리를 점치는 분위기도 있다. 특히 7월12일 〈폴리티코〉의 보도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초 임기가 만료되는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후임으로 콘 NEC 위원장을 낙점한 게 사실이라면 국제파로선 백만 원군을 얻은 셈이다. 물론 콘이 연준 의장에 오른다고 해서 트럼프가 자유무역주의를 선호하는 국제파의 손을 들어줄지는 미지수다.

국내외 주요 현안을 둘러싼 국수파와 국제파 간의 ‘내전’은 결국 양측의 대표 선수라 할 수 있는 배넌 혹은 쿠슈너가 완전 퇴진하지 않는 한 트럼프 행정부 내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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