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아무 조건 없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감행했다면 무모하다. 미국이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넘는 북한 미사일 발사 시험을 ‘레드라인’으로 삼아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북·미 간 사전 접촉에서 모종의 협상 조건을 제시한 뒤 발사가 이뤄졌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협상의 출구를 마련하기 위한 계획적인 도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4일 발사한 북한의 화성 14호는 후자에 가깝다. 비공식으로 북한이 요구 조건을 미국에 전달했고, 미국은 이를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한국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미 양국이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이 제시한 내용을 공유했다는 의미다. 정상회담 직전 양국의 수뇌부가 ‘선 동결·후 비핵화’라는 2단계 북핵 해법에 공감했던 게 결코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다(〈시사IN〉 제511호 ‘선 동결·후 비핵화, 한·미 정상 합의할까?’ 기사 참조).

ⓒ연합뉴스북한은 지난 4일 실시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 발사를 통해 미사일 탄두부의 대기권 재진입 및 단 분리 기술을 시험했다고 노동신문이 5일 보도했다. 2017.7.5

그리고 ‘텔레파시가 통하듯’ 비슷한 시기 서울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고문인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도 문 대통령의 해법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리처드 하스 회장은 문 대통령과 만나 한·미 정상회담을 사전 조율했는데,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미 정상회담 직후 〈시사IN〉은 북·미 관계에 정통한 소식통에게서 ‘북한이 미국에 북한 핵 동결 조건과 관련한 협상안을 제시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적어도 한·미 정상회담 전 미국은 북한의 조건부 핵 동결 의사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시한 북핵 2단계 해법을 상세하게 나누면 ‘유예(모라토리엄)-동결-불능화-비핵화’의 4단계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이라는 ‘유예’ 조치를 건너뛰어, “핵 동결을 북핵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는 미국 측의 ‘사전 통고’ 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미 간 북핵 해법 퍼즐 맞추기는 지난 5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북·미 1.5트랙(반관반민·半官半民) 대화부터 시작되었다.


오슬로 북·미 1.5트랙 대화는 5월8일(현지 시각) 시작되어 5월9일 끝났다. 이 모임에 참석한 양측 인사들 명단이 확인되었다. 북한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장이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수전 디매지오 뉴아메리카 재단 국장 등 민간 전문가 또는 전직 정부 고위직 인사들이 나섰다.

현직 고위급 인사가 이례적으로 이 모임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졌다. 6월12일 평양에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데리고 나온 이는 조지프 윤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다. 미국 측은 처음에는 조지프 윤이 웜비어를 데리고 나오기 전까지 오슬로 1.5트랙 대화에 참여했던 사실을 숨겼다. 국무부의 현직 6자회담 수석대표가 인질 석방 외교에 뛰어든 된 경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슬로 회담 참가 사실까지 밝히게 된 것이다.

“북한이 미사용 핵연료봉 보상금 액수 제시”

그렇다면 오슬로 회담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북한 핵 동결 조건을 협의하기 위한 막후 비밀 접촉이 그것이다. 북·미 관계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측은 이 회담에서 핵 동결을 위한 협상 조건을 제시했다고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북·미 양측 간에는, 북한이 미사용 핵연료봉을 넘기고 그 대신 받을 보상금 액수까지 오갔다고 한다. 미국 측에서 10억 달러를 제시했으나 북측은 자신들이 상정한 액수보다 턱없이 적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외교통상부 제공

ⓒ외교통상부 제공2009년 2월 외교통상부 등 정부 관계자는 미사용 핵연료봉(아래)의 상태와 매입 가치 등을 검토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미사용 핵연료봉 문제는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10·3 합의에 따라 북한 핵의 비핵화 조치 일환으로 제기됐다. 당시 한·미 양국은 김정일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영변의 냉각탑 폭파와 함께 북측이 보유한 미사용 핵연료봉을 한국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미사용 핵연료봉이란 발전용 원자로를 태우고 난 뒤 발생하는 폐연료봉을 말한다. 이것을 재처리하면 핵무기 제조용 플루토늄-239를 추출할 수 있다. 이것을 남측에 판매한다는 것은 핵 동결을 하겠다는 직접적인 의사표시다. 당시 북한에는 1991~1994년 생산한 1만4800여 개 폐연료봉이 있었다. 영변 5MW 원자로용 2400여 개, 50MW  원자로용 1만2400여 개다. 우라늄으로 101.9t에 해당된다고 한다. 임기를 다한 노무현 정부가 이 내용을 후임 이명박 정부에 알렸다. 이명박 정부는 남쪽에서 재처리하면 원자력발전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북한이 요구한 액수가 국제 시세보다 비싸다는 이유로 구매를 거절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을 비핵화할 절호의 기회를 걷어찬 이명박 정부 조치에 대해 의아해했다.


10년 전 해결했다면 국제 시세보다 조금 비싸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싼 값에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년 동안 북한이 보유한 미사용 핵연료봉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으리라 보인다. 북한은 2007년 핵 합의 이후 가동을 중단해온 영변 5MW 원자로를 3차 핵실험 직후인 지난 2013년 3월 재가동하겠다고 선언했다. 2016년 8월에는 보유 중이던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 추출을 시작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의 5MW 원자로는 한꺼번에 8000개 연료봉을 가동할 수 있다. 보통 무기급 플루토늄 추출을 위해서는 원자로를 1년 가동한 후 연료봉을 교체한다. 결국 2013년 가동 후 현재까지 연료봉을 몇 번 교체했는지, 그리고 2016년 이후 플루토늄을 얼마나 추출했는지에 따라 미사용 핵연료봉 개수와 북한이 요구한 액수도 달라진다.

이명박 정부는 당시 북한이 국제 시세보다 몇 배 높은 가격을 불렀다고만 하고, 정확한 액수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시사IN〉이 접촉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측이 당시 부른 가격은 5억 달러 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 측은 이번에 변동 상황을 감안해 10억 달러를 제시했다. 북측은 이번에도 자신들이 염두에 둔 50억 달러에 비해 가격이 턱없이 낮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소식통은 “오슬로 회담 직후 북한은 미사일 세 발을 발사해 불만을 표시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아무 얘기가 없자 화성 14호를 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연합뉴스6월30일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오슬로 1.5트랙 대화가 있기 약 한 달 전인 지난 3월 말, 북한과 중국 사이 핵 폐기 대가를 둘러싼 비밀협상이 막바지에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당시 북한은 중국 측에 “중국을 포함한 주변 각국이 500억 달러를 제공하고 미·중·러가 안전을 보장하면 핵을 폐기하겠다”라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에 중국은 100억 달러를 유상 지원할 수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 핵 폐기 대가를 둘러싼 협상이 결렬된 뒤 북한이 미국과 직접 핵 동결 대가를 둘러싼 협상을 시작한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동안 북한과 미국 간에는 핵 동결을 둘러싸고 많은 대화가 오갔다. 오바마 정부 때 한·미 양국이 핵 동결에 부정적이었고 미국 군산복합체의 반대도 극심해 무시됐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는 북한에 일단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북측이 요구한 돈을 누가 내느냐이다. 트럼프 정부는 당연히 돈은 한국이 냈으면 좋겠다는 뜻을 지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전달했으리라 보인다. 5월9일 오슬로 회담이 끝나고 한국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트럼프 대통령이 첫 통화에서 빨리 한·미 정상회담을 갖자고 말한 이유를 이제 짐작할 수 있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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