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판인들은 한 재독 철학가의 저서를 ‘올해의 책’ 가운데 한 권으로 꼽았다. 〈역사는 끝났는가〉라는 책이었다.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후배들과 토론도 했다. 문맥에 가려진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출판사를 통해 저자의 독일 현지 연락처를 알아냈다. 문제는 그 이후. 공안기관은 저자를 친북 인사로 분류하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거 아니냐” “통일부 허락을 받고 연락하자” 등 ‘새가슴 학생’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한 선배가 총대를 멨다. 문제가 생기면, 그 선배가 모두 책임지는 것으로 말을 맞추었다. 팩스를 구해 선배 하숙집에서 장문의 질문지를 독일로 보냈다. 답이 없었다. 1995년 11월5일 국제전화를 했다. “질문지는 받았어요. 어제 윤이상 선생이 돌아가셔서 내가 정신이 없네요. 꼭 답변을 할게요.” 3~4일 뒤 질문지의 서너 배가 넘는, 육필로 쓴 답변이 팩스로 왔다. 물론 그 선배는 무사했다.

2003년 9월, 37년 만에 귀국한 그 재독 철학자를 만났다. 송두율. 371일 귀향 기간 그와 한국 사회는 홍역을 앓았다. 공항에서, 국정원 앞에서, 법정에서, 서울구치소 앞에서 그를 취재했다. 2015년 10월 취재차 방문한 독일 베를린 자택에서 송 교수를 다시 만났다. 그와 함께 윤이상 선생의 묘소와 자택을 찾았다. 윤 선생은 베를린 시 외곽 가토우 지역에 있는 시립묘지에 묻혔다. ‘인류에 명예로운 유산을 남긴 인물’이라며 베를린 시가 유일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묘비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윤이상 자택은 방치되어 풀밭이었다.


윤이상·송두율 두 사람을 떠올린 건 김정숙 여사의 행보 때문이다. 아직도 윤이상 선생을 빨갱이로 보는 시선들이 분명히 있는데 김 여사는 독일 순방 길에 그의 묘를 찾았다. 그를 빨갱이로 보는 이들은 군사정권마저 그를 초청하려 했던 사실을 알까. 그를 납치한 박정희 정권마저, 윤이상 선생이 뮌헨올림픽 개막을 위해 만든 오페라 〈심청〉을 국립극장 개관 기념으로 공연하고 싶어 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2년 대한민국 국제음악제 때, 노태우 정권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맞아 그를 초청하려 했다. 윤이상 선생은 군사정권의 초청을 거부했다.

이번 참에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지난 3월 한국어로 된 열두 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라고 밝힌 〈불타는 얼음〉을 낸 송두율 교수를 다시 초청하는 것이다. 14년 전 우리 사회가 ‘경계인’을 ‘이방인’으로 만들었다면, 이제는 다시 경계인으로 회복시켜줄 때도 되었다. 윤이상 선생의 묘를 둘러보고 오는 차 안에서 일흔한 살 송 교수가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이들이 반대하는데, 내가 죽으면 유골을 휴전선에 뿌려달라고 할까도 생각했다.” 국내에서 그의 출판기념회를 보고 싶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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