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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과 송두율을 떠올린 이유

고제규 편집국장 unjusa@sisain.co.kr 2017년 07월 10일 월요일 제5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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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출판인들은 한 재독 철학가의 저서를 ‘올해의 책’ 가운데 한 권으로 꼽았다. <역사는 끝났는가>라는 책이었다.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후배들과 토론도 했다. 문맥에 가려진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출판사를 통해 저자의 독일 현지 연락처를 알아냈다. 문제는 그 이후. 공안기관은 저자를 친북 인사로 분류하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거 아니냐” “통일부 허락을 받고 연락하자” 등 ‘새가슴 학생’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한 선배가 총대를 멨다. 문제가 생기면, 그 선배가 모두 책임지는 것으로 말을 맞추었다. 팩스를 구해 선배 하숙집에서 장문의 질문지를 독일로 보냈다. 답이 없었다. 1995년 11월5일 국제전화를 했다. “질문지는 받았어요. 어제 윤이상 선생이 돌아가셔서 내가 정신이 없네요. 꼭 답변을 할게요.” 3~4일 뒤 질문지의 서너 배가 넘는, 육필로 쓴 답변이 팩스로 왔다. 물론 그 선배는 무사했다.

2003년 9월, 37년 만에 귀국한 그 재독 철학자를 만났다. 송두율. 371일 귀향 기간 그와 한국 사회는 홍역을 앓았다. 공항에서, 국정원 앞에서, 법정에서, 서울구치소 앞에서 그를 취재했다. 2015년 10월 취재차 방문한 독일 베를린 자택에서 송 교수를 다시 만났다. 그와 함께 윤이상 선생의 묘소와 자택을 찾았다. 윤 선생은 베를린 시 외곽 가토우 지역에 있는 시립묘지에 묻혔다. ‘인류에 명예로운 유산을 남긴 인물’이라며 베를린 시가 유일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묘비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윤이상 자택은 방치되어 풀밭이었다.


윤이상·송두율 두 사람을 떠올린 건 김정숙 여사의 행보 때문이다. 아직도 윤이상 선생을 빨갱이로 보는 시선들이 분명히 있는데 김 여사는 독일 순방 길에 그의 묘를 찾았다. 그를 빨갱이로 보는 이들은 군사정권마저 그를 초청하려 했던 사실을 알까. 그를 납치한 박정희 정권마저, 윤이상 선생이 뮌헨올림픽 개막을 위해 만든 오페라 <심청>을 국립극장 개관 기념으로 공연하고 싶어 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2년 대한민국 국제음악제 때, 노태우 정권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맞아 그를 초청하려 했다. 윤이상 선생은 군사정권의 초청을 거부했다.

이번 참에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지난 3월 한국어로 된 열두 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라고 밝힌 <불타는 얼음>을 낸 송두율 교수를 다시 초청하는 것이다. 14년 전 우리 사회가 ‘경계인’을 ‘이방인’으로 만들었다면, 이제는 다시 경계인으로 회복시켜줄 때도 되었다. 윤이상 선생의 묘를 둘러보고 오는 차 안에서 일흔한 살 송 교수가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이들이 반대하는데, 내가 죽으면 유골을 휴전선에 뿌려달라고 할까도 생각했다.” 국내에서 그의 출판기념회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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