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9일,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 사망한 연세대 이한열 학생의 장례식장에서 문익환 목사가 목이 터져라 불렀던 스물여섯 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그 소중한 목숨을 내던진 그분들의 이야기를 지금껏 들려주었지. 오늘은 그분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건져 올려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문 목사 본인의 이야기를 전해보고 싶구나.

문익환 목사의 고향은 만주 용정이다. 문 목사에게는 어릴 적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는 오래 살지 못했지만 한국인들에게 영원히 ‘스타’로 남아 있는 사람이야. 바로 시인 윤동주.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시 〈서시(序詩)〉의 주인공. 윤동주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본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서 그 젊음이 스러지고 말았지만 문익환의 가슴속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향한 기도와 ‘오늘도 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으로 선명하게 남았지.

그는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계에서 유망한 신학자로 성장해. 한국에서 손꼽히는 구약학자로서 우리가 오늘날 읽는 시편을 비롯한 많은 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우리 곁에 왔다고 하는구나. 또 그는 판에 박힌 성경 해석을 넘어 새롭고도 역사적인 해석을 더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부르짖던 열정적인 설교자였어. 우리가 말하는 ‘히브리’ 민족의 연원을 ‘아브라함의 후손’, 즉 일종의 혈연공동체가 아닌 하층 집단의 연맹을 일컫는 ‘하비루(천민·노예·강도 등을 뜻함)’로 보았던 그는 구약성서를 관통하는 민중과 지배의 역사, 압제와 저항, 폭군과 예언자의 역사를 통해 ‘민중’의 중요성을 부르짖었단다. 아닌 게 아니라 구약성서의 호세야,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서를 읽으면 기울어져가는 왕조, 탐욕스러운 기득권자들에 대한 치 떨리는 분노가 수천 년을 뛰어넘어 가슴을 찌를 때가 있어. 미가서의 몇 구절을 읽어보자.

ⓒGoogle 갈무리숭실중학교 재학 시절의 문익환(왼쪽)과 윤동주.

“내 겨레에게서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들아. 살을 뜯고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며 냄비에다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 것들아! … 권력을 잡았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미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을 만나면 그 밭을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밭 임자까지 종으로 부려먹는 것들아!(〈문익환 전집〉 중)”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유효하지 않을까. ‘젠트리피케이션’이다 뭐다 피땀 흘려 일군 삶의 터전을 빼앗아버리는, ‘조물주’보다 높은 ‘건물주’, 그들에 의해 삶의 터전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이 성경 말씀은 어떻게 들릴까. 변호사 개업하고 1년 만에 수백억원을 챙기는 유능한 나리들과 돈 몇백만원이 없어 목숨을 끊는 이들이 공존하는 나라에서 이 말씀은 수천 년 전 미가의 절규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을 거야. 문익환은 성경 속에서 오늘을 보았고 수천 년 전의 예언들 속에서 눈물을 흘렸고 분노를 쌓았고 정의에 굶주렸단다. 그에게 또 한 번 계기가 왔어.

1975년 8월 걸출한 민주화운동가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찌는 듯이 무덥던 날, 등산을 갔다가 경기도 포천의 국사봉이라는 곳에서 ‘실족사’한 거야. 그분의 죽음에는 허다한 의문부호가 서려 있어. 인적도 드문 험한 곳으로 구태여 ‘등산’을 갔던 이유를 비롯해 석연찮은 정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장준하, 이분만큼 치열하게 독재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저항한 사람도 드물 거야.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일파’라 일갈하고 정부와 기업이 결탁한 대규모 밀수 사건이 벌어지자 대통령에게 ‘밀수 왕초’라고 쏘아붙였을 정도니 그 기개를 짐작하겠지. 〈사상계〉라는 잡지의 발행인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등대 노릇을 하며 사람들을 일깨웠고, 그를 감시하던 정보기관 요원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재야의 대통령’이었어. 그도 문익환의 절친한 친구였다.

“서로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되지 않겠소?”

친구 장준하의 의혹 넘치는 죽음을 계기로 문익환 목사는 드디어 얌전한 목사, 책상머리의 구약성서 번역자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를 향해 분노를 내지르고 새로운 세상의 빛을 뿌리는 예언자로 나선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진 가운데(구약성서 하박국 1장 3~4절)” 불의에 맞선 맹렬한 시인으로 내달았던 거야.

ⓒ연합뉴스1994년 1월22일 문익환 목사의 운구 행렬이 서울 대학로를 지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아호를 ‘늦봄’이라고 지었어. 여기서 봄이란 계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뜸’을 의미하는 ‘봄’이었어. ‘세상을 뒤늦게야 보았다’는 탄식과 반성의 의미로 지은 아호였고 먼저 깨닫고 행동했던 친구들의 뒤를 잇겠다는 다짐의 작명(作名)이었지.


늦바람이 무섭다지만 ‘늦봄’의 기세도 무서웠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면서 “늦게 세상을 본(현실에 참여한)” 이후 그가 숨진 1994년까지의 18년 동안 그는 11년이 넘도록 감옥에 있었어. 1976년 당시 그 나이는 쉰아홉 살, 평균수명이 남자 예순을 겨우 넘던 시절이었으니 인생의 황혼기에 문익환의 늦게 본 해는 다시 찬연히 떠오른 셈이야.

그렇게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게 됐지만 문익환 목사는 냉철한 전략가가 아닌 열정적인 시인이었다. “제발 죽지 말고 싸우라고 해라. 독립군들이 스스로 죽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전하려는 순간 불덩이가 돼 떨어지는 대학생을 보고 충격받아 스스로 당국에 출두해 감옥에 갔던 일은 얘기했지? 6공화국 출범 이후 그는 사람들을 충격의 바다에 빠뜨리는 거사를 단행해. 1989년 초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 거야.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문익환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고 노래했던 문익환 목사가 별안간 평양에 나타난 거야. “아뿔싸 저 양반 잠꼬대가 아니었구나.”

북한 일정을 끝낸 문익환 목사는 이왕 온 김에 어디든 모실 테니 북한 구경도 하고 가라는 북한의 권유를 뿌리쳤단다. 그 이유는? “나 여권 만료일이 4월13일이거든요.”

아빠는 이 에피소드를 문익환의 ‘준법정신’의 발현으로 보지 않아. 법 같지 않은 법 따위는 어기는 걸 법으로 알던 분 아니겠니. 훗날 검사에게 얘기했던 대로 “남북이 서로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되지 않겠소?” 했던 것처럼, 그는 북한에도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나도 대한민국 여권 가진 사람으로 국가보안법은 어길지언정 지킬 건 지킨단 말이오. 당신들도 그러시오”라고 말이야. 문익환 목사는 그런 사람이었어. 감성에 호소하되 몽상에 빠지지 않았고, 시를 쓰는 이로서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넘어섰지만 항상 예언자로서 현실을 바라보는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고나 할까.

1994년 겨울 홀연 세상을 뜬 문익환 목사의 영결식장은 수많은 인파로 붐볐고, 고인의 뜻에 찬성했든 반대했든 대한민국 역사에 우뚝 섰던 거인의 퇴진을 함께 애도했다. 그때 부른 노래를 들려주마. 그를 존경하던 작곡가가 하룻밤 사이에 만든 노래였다지. “버려진 사선 철길을 따라 민중의 가슴 차표를 쥐고 그대 오르네 철책 면류관 쓰고 저 언덕을 오르네 (중략) 우리 지친 어깨 일으켜 떨리는 손을 마주 잡는다 갈라진 조국 메마른 이 땅 위에 그대 맑은 샘물줄기여. 죽음을 넘어 부활하는 산 피투성이 십자가 메고 그대 오르는 부활의 언덕 위로 우리 함께 오르리.”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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