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이름 모를 재소자들이 민주주의 유공자인 까닭

억울하게 삼청교육대에 보내지고, 이에 항의하다 청송 보호감호소에 끌려간 박영두는 고문방에서 구타당해 사망했다. 동료 수감자들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인질극을 벌였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7월 14일 금요일 제512호
댓글 0

1987년 7월 이한열 학생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애타게 부른 스물여섯 명의 이름 가운데에는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자라거나 또는 ‘열사(烈士)’라는 엄숙한 단어에 걸맞다 하기에는 좀 어색한 분도 한 명 끼어 있어. 박영두라는 사람이야. 그는 ‘대학물’을 제대로 먹은 사람도 아니었고 공장에 다니며 노동조합 활동을 한 사람도 아니었어. 하지만 문익환 목사는 그를 ‘열사’의 대열에 합류시켰지. 박영두는 누구였을까.

ⓒ시사IN 포토
1984년 청송 보호감호소에서 재소자 박영두씨(당시 29세)가 교도관의 폭행으로 사망했다.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 스물여섯 살로 경기도 이천에서 친척이 운영하는 체육사에서 점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박영두는 여름을 맞아 통영의 비진도해수욕장을 찾았어. 그런데 갑자기 경비정을 타고 살기등등한 군인들이 밀어닥쳤어. 한창 ‘사회 정화’를 부르짖으며 ‘불량배 소탕’을 노래하던 시기, 군인들은 해수욕장에 있던 젊은이들을 싹쓸이해서 끌고 갔지. 거기서 몇 대 맞고 풀려난 사람도 있었지만 박영두는 그렇지 못했어. 그에게는 폭력 전과가 있었거든. 박영두는 ‘삼청교육대’라는 이름의 교육장으로 끌려간다.

전두환 정권은 폭력 전과자, 술 취해서 거리를 휘청거리며 걷던 사람부터 불량 학생, 노동조합원, 몸에 문신 있는 사람들 등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영장이나 판결도 없이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어. 등급을 제멋대로 매겨 각지의 군부대에 배치해 죽도록 ‘훈련’시켰던 전두환 최대의 범죄 중 하나가 바로 삼청교육대야. 1980년 8월1일부터 1981년 1월25일까지 총 6만755명이 무작위 체포되어 그중 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된 3만9742명이 군부대 내에서 삼청교육을 받았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박영두가 보내진 곳은 고향에서 천리 길 떨어진 강원도 화천. 각지에서 끌려온 ‘깡패’들은 지옥 같은 훈련에 시달렸어. “27사단 77연대 4대대에서 개돼지보다 못한 생활을 했다. 경비병들은 지프에 감호생을 매달고 달렸고, 연병장에 유리병을 깨뜨린 후 옷을 벗긴 상태에서 포복을 시켰다(<시사저널> 제888호 주진우 기자, ‘잔혹한 살인자들 22년째 떵떵거리네’ 기사 참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고 딱정벌레도 누르면 발버둥을 치는 법이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못 이겨 반항하는 사람이 나오면 군인들은 잔인한 폭행으로 그에 화답했다. 이를 지켜보던 교육생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끝에 군인들은 총을 쐈어. 몇 명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몇 명이 팔다리를 잃었는지도 몰라. 박영두는 그 ‘난동’의 주모자로 찍혀서는 무려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이후 그는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오지로 정평이 난 경북 청송에 있는 보호감호소로 끌려간단다. 198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아빠에게도 ‘청송 보호감호소’는 영화 <빠삐용>이 끌려간 남미 가이아나의 감옥과 비슷한 느낌으로 기억에 남아 있어. 그만큼 특별한 감옥이었어.

하지만 삼청교육대의 그 살벌한 조교들에게 대들었던 박영두의 분노는 청송에서도 식지 않았어. 1983년 11월, 재소자 이상훈씨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보호감호 철폐’ 등 12개 요구 사항을 내걸고 단식 농성에 들어가기도 했으니까. 박영두는 감옥의 ‘끝판왕’이라 할 청송 보호감호소에서도 더욱 특별한 특별사동의 요시찰 인물이 됐어.

1984년 10월 박영두는 몸이 아파 치료를 요청하게 되는데 교도관들은 그를 의무실이 아닌 지하 특별 고문방으로 데려갔어. 사방이 고무로 돼 있어서 고통을 못 이긴 재소자가 머리로 벽을 들이받아도 탈이 없도록 한, 오로지 매를 때리는 사람에게 ‘최적화’된 방이었지. 거기서 교도관들은 몽둥이와 포승을 엮은 꽈배기, 혁대, 고무호스, 그리고 발길질로 박영두의 지친 몸을 부쉈지. 의식을 잃으면 물을 끼얹어가면서까지 때렸다고 해. 그 후 교도관들은 박영두를 빈틈없이 꽁꽁 묶어서 감방에 내동댕이쳐버렸어. 박영두는 구역질을 하면서 고통을 호소했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교도관들은 외면해버렸고 박영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운 결박 속에서 서른 살 짧은 생을 마치고 말아. 그가 가고 싶어 했던 의무실의 의사는 그 죽음에 ‘심장마비’라는 판정을 내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지만 박영두에게는 동료들이 있었어.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든 전과 수십 범의 중죄인이거나 살인자 같은 흉악범일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다가 눈 치뜨고 죽어간 동료의 죽음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박영두가 사망한 1주기를 맞아 재소자들은 법정이나 검찰에서 박영두의 억울한 죽음을 폭로할 기회를 얻기 위해 가공할 만한 모험을 벌이게 돼. 교도관 여덟 명을 인질로 삼아 사흘 동안이나 버틴 거야. “박영두 사건의 가해자를 검찰에 고발하라!” 우리를 감옥 밖으로 내보내달라도 아니고, 제대로 된 대우를 해달라도 아닌, 사람을 죽인 사람을 고발해달라는 죄인들의 농성. 적어도 그 순간 정의의 여신도 적잖이 당황했을 거야. 대체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 재소자들의 농성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무려 여섯 명이 이를 악물고 칫솔을 삼킨다. 치료받으러 나가서라도 동료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려는 몸부림이었지. 다섯 명이 삼킨 칫솔은 얌전히 식도와 위와 창자를 거쳐 밖으로 나왔지만 단 한 명은 칫솔을 몸에 담은 채 외래 진료에 나선다. 그는 거기서 박영두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는 쪽지를 남기게 돼. 박영두의 이름은 그렇게 조금씩 흘러나왔고 문익환 목사는 ‘열사’라는 호칭으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앞당긴 이들의 자리에 박영두를 올려 세우게 됐던 거야.

민주주의 기본 정신은 ‘인간의 존엄성’

ⓒ연합뉴스
1980년 전두환 정권은 영장이나 판결도 없이 민간인을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다.

그의 사망에 국가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죽은 지 20년도 더 지나서였어(2000년 10월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박영두 죽음의 진실을 밝혔고, 2006년 8월이 되어서야 박영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그에게 민주화운동 유공자 호칭이 붙은 것을 두고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전과자 흉악범에게 무슨 민주화운동이냐.” 하지만 문익환 목사는 이미 1987년에 일찌감치 그를 열사로 불렀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좀 다른 이야기지만 비전향 장기수라 불린 사람들이 있어. 북한 공작원으로 남한에 침투하여 체포돼 장기간의 옥살이를 했던, 그러나 우리 당국이 강요했던 ‘전향(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대한’을 선택한다는 선언)’을 거부한 사람들이지. 2004년 비전향 장기수 몇 명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면서 파문이 인 적이 있어. “간첩에게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웬 말이냐!”는 반발이었지. 하지만 아빠는 생각이 달라. 아빠는 그들의 사상에 명백히 반대하지만, 그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고 봐.

몇 번이나 얘기했다마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은 ‘인간의 존엄성’이야. 그래서 인간 존엄함의 의미를 드높이는 모든 움직임은 민주주의에 기여했다고 표현할 수 있어. 설령 북한에서 파견한 간첩들이라고 해도, 체포 후 사법부의 심판을 받았다면 그 이후로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허용되는 최소한의 권리와 인간적 존엄을 보장받아야 해. 그게 민주주의야. 그런데 정부는 법적 처벌의 범위를 넘어서 그들의 머릿속을 바꾸라고 강요했어. 이야말로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는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니었을까?

똑같은 의미로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박영두는 지은 죄도 없었지만) 자신들의 최소한의 권리를 위해 싸우다 온몸이 뒤틀린 채 죽어간 박영두,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칫솔을 삼키면서 발버둥 쳤던 이름 모를 재소자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유공자가 되는 거란다. 명심하기 바란다. 민주주의란 특별하게 용감한 사람들, 정의로운 사람들만이 지키는 게 아니란다. 네 자리에서 부당함에 항의할 줄 알고, 네 권리를 누군가 빼앗아가는 일에 분노할 줄 아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야.

<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