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도 영화처럼 또렷하게 재생되는 기억이 있다. 처음 내 방, 내 침대를 갖게 된 일곱 살의 어느 날. 부푼 마음으로 방문을 연 순간 분홍색 침대를 보고 나는 통곡하고 말았다. 하필 가장 싫어하는 분홍색이 내 첫 침대라니! ‘공주님 방’이라며 나를 달래는 말도 기쁘지가 않았다.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물어봐주는 어른 대신 여자아이는 당연히 분홍색 물건이 어울린다고 여기는 어른들뿐이라는 게 내가 일곱 살에 느낀 첫 번째 외로움이었다.

옛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까닭은 얼마 전 SBS의 〈영재 발굴단〉을 보고 나서다. 대학생 수준의 영어회화 능력을 갖췄다는 다섯 살 어린이를 소개하던 중, 카메라는 부모의 걱정 어린 눈으로 초점을 옮긴다. 칼싸움을 좋아하고 남자가 되고 싶다는 이 아이는 원피스 형태의 유치원복을 거부한다. 바지를 입고 유치원에 가면 혼자만 다른 옷차림 때문에 친구가 없다.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부모는 고민이다.

불편함의 종착지는 상대방 아닌 나 자신이어야

연예인 패널들은 “머리가 길 때는 예뻤는데” “여자아이는 ‘여성성’이 나오기 마련” “공주처럼 키우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라며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전문가는 상담을 통해 아이가 아픈 엄마를 지키기 위해 남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이어 전문가는 부모에게 아이와 신체활동을 많이 하고 자유롭게 옷을 입히도록 당부했지만, 곧바로 “(그렇게 하면 아이의 ‘남성성’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들 것”이라는 성우의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정켈 그림

정말로 ‘사그라들어야’ 하는 건 이 사회의 성별 이분법과 성 역할 고정관념이다. 남자가 반드시 여자보다 강하거나 강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다고 알려주는 어른, 성별에 관계없이 원하는 옷을 입고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도록 돕는 유치원이 있었다면 이 가족은 고민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해당 방송에서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주변을 바꾸려는 의지보다는 마지막까지 아이를 교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연민 섞인 시선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으로 세상을 가르고, 여기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일종의 비정상이나 결핍으로 취급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KBS 2TV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남자아이가 장난감 화장대에 관심을 보이면 어른들은 다른 장난감을 권하지만, 중장비를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는 직접 체험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역시 KBS 2TV 〈안녕하세요〉에 남자 모델 사진을 모으는 남자, 분홍색 옷을 좋아하는 남자가 출연하면 연예인 패널들은 연애 경험을 캐묻기 시작한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건강한 남자’인데 트라우마나 콤플렉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라는 식의 답변을 기어이 받아낸다. ‘남자(혹은 여자)라면 그럴 리가 없어’라는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존재할 수 있음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는 모두 분명한 차별이고 폭력이다.

〈영재 발굴단〉과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MBC 〈PD수첩〉은 성 소수자 인권을 다루면서 다양한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소개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성과 실제 성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여기에 출연한 한 비수술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옷차림에 편견을 갖는 사람들이 “나는 왜 저 사람이 불편하지?”라고 느끼며 고민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바뀌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그의 말처럼 ‘남자답지 않은 남자’나 ‘여자답지 않은 여자’, 혹은 남녀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누군가를 볼 때 불편함을 느낀다면 이제 그 불편함의 종착지는 상대방이 아니라 불편함을 느끼는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기자명 양정민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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