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끄트머리에 강원도 동해에 갔다. 그곳 고등학교 학생들이 〈예민해도 괜찮아〉의 저자 이은의 변호사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철야를 밥 먹듯 하는 저자가 기꺼이 간다기에 나도 덩달아 따라나섰다. 동해의 싱싱한 회라는 잿밥에도 물론 관심이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이 〈예민해도 괜찮아〉를 어떻게 읽었을지 몹시 궁금했다.

이은의 지음
북스코프 펴냄

방학인데도 교실 한가득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자를 초청한 글쓰기 동아리 회원들과 책을 읽은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들이었다. 출간 이후 북토크나 대학생·직장인 강연 등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진지한 태도로, 자기 의견과 질문거리를 꼼꼼히 준비해온 경우는 드물었다. “다른 사람의 성희롱을 목격할 때 주변인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습니다”라는 소감을 시작으로 “저처럼 소심한 사람은 결정적 순간에 어떻게 노(No)를 외쳐야 할까요?”부터 “메갈리아 관련 논쟁을 어떻게 보십니까?”까지 무려 27개 질문을 미리 선별해온 학생들. 야무진 그들 뒤에는 큰 개입 없이 든든하게 지원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이 책을 만들 때만 해도 ‘불쾌한 터치와 막말에 분노하는’ 20대 여성들을 주 타깃으로 했지 청소년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예민해도 괜찮아〉를 먼저 읽고 학생들에게 권해주는 선생님이 꽤 많았다. 나아가 그분들은 학생들과 토론하고 저자를 초빙해 직접 이야기 듣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었다.

먹고살기가 힘든 때일수록 아르바이트생, 인턴, 비정규직, 신입 사원 들은 군소리 없이 일하기를 강요받는다. 앳된 이 학생들도 앞으로 너른 사회로 나가면 온갖 불합리와 차별, 갑질에 맞닥뜨릴 게 뻔하다. 그에 앞서 아직 파릇파릇한 시절에 ‘부당한 상황을 참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는 책을 만난다면, 그런 책을 권해주는 이들이 곁에 있다면 좀 더 씩씩하고 똑똑한 어른으로 자라지 않을까?

기자명 정정희 (북스코프 기획편집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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