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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1986년 봄, 한 달 간격으로 서울대생 네 명이 독재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죽음을 지켜본 문익환 목사는 통곡하듯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7월 06일 목요일 제5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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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한다는 건 개인의 영광이요 가문의 기쁨이었고 이웃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서울대생이 장밋빛 미래를 버리고 가시밭길을 택했으며 죽음으로 독재에 항거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1987년 7월 고 이한열 학생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목메어 부른 ‘열사’ 26명 가운데 서울대생이 아홉 명이나 되거든.

그 가운데 네 명은 1986년 봄, 한 달 간격으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김세진·이재호·이동수 그리고 박혜정. 먼저 1986년 4월28일 전방 입소(전두환 정권 때는 대학생들을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입소하여 ‘교육’을 시켰단다)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이던 도중 서울대학교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과 정치학과 83학번 이재호가 스스로 몸에 불을 댕겼어. 그런데 김세진의 경우 부모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어. “충격이 크시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주 여유 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하면서도 아주 열심히 싸울 것이고, 성실히 고민할 것입니다. 경찰에게는 지난 수요일부터 쭉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얘기해주세요.” 즉 분신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결행한 건 아니었다는 것이지. 하지만 무슨 사연인지 두 젊은이는 친구들의 눈앞에서 불덩이가 되어 쓰러졌어. 이윽고 1980년대 내내 범상치 않았던 5월이 왔지.

ⓒ연합뉴스
1988년 4월 서울대 도서관 앞에서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 열사 2주기 추모식을 하고 있다.

1986년 5월20일 서울대 오월제에 문익환 목사가 찾아온다.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재조명’이라는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지. 김세진·이재호 학생에 대한 묵념 후 강연을 시작하려는데 학생회관 4층 옥상에서 날카로운 구호 소리가 들려왔어. 원예학과 83학번 이동수였지. 그는 연신 “폭력경찰 물러가라, 전두환을 처단하자” 외치고 있었지.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중 상당수는 또 한 번의 분신 사태가 일어날 거라는 걸 직감했다고 해.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안 돼!” 외치는 가운데 이동수는 온몸이 불덩이가 돼 땅으로 떨어져 내렸어. 그는 운동권 활동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학생이었어. 오히려 81학번 선배들한테 몰매까지 맞은 적이 있다고 했지. 삼수생으로 나이가 81학번 또래였던 그가 선배들에게 존댓말 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야(<서울대저널> 제141호 중 인용). 이른바 운동권 조직의 일원도 아니었으나 뒤틀린 나라에 분노하고 정직하게 항거했던 한 청년은 스스로 생명을 거뒀다. 그의 유서 중 인상 깊은 한마디. “‘아니오’라고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


눈앞에서 사람이 불타 떨어지는 걸 본 서울대 학생들은 걷잡을 수 없이 분노했어. 그때 도서관에는 한 학생이 뛰어 들어와 열람실 안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해. “사람 죽었다 이 자식들아. 나와서 싸우자. 안 싸우겠으면 나와서 구경이라도 해라.” 운동권이든 아니든 전두환 정권의 야만에 분노하고 있던 서울대생들은 도서관과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어. 돌을 던지고 경찰과 육박전을 벌이면서도 많은 학생들은 울고 있었다. 그 가운데 국문학과 83학번 박혜정도 있었어.

용기 없음을 자책하던 젊은이는…

박혜정의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다고 해. 공식적으로 연좌제가 폐지되긴 했으나 데모하는 자식을 둔 군인, 공무원 아버지는 그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어. 그래서 “네가 데모하면 우리 집안이 망한다”는 게 현실적 압박이던 때였지. 박혜정 역시 엄한 집안 분위기에서도 데모에 종종 참여했지만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다고 해. 가족과의 갈등이 엄청났을 것이고, 본인이 가꿔온 문학도로서의 꿈도 소중했을 테니까. 그녀는 동짓달 그믐밤같이 날선 독재 치하의 암흑과 제 몸을 불태워 발하는 순백 사이의 회색지대에 남아보려고 애썼어. 하지만 이동수가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는 모습을 본 그녀 역시 울면서 돌을 들었다. 용기 없음을 스스로 질책하던 한 젊은이의 폭발이자 외면할 수 없는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선언이었지. 그날 그녀는 평생 처음 외박을 했고 이후 버스를 탔지만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았고 며칠 뒤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어.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버무려져 있었어.

ⓒ연합뉴스
1987년 7월8일 경남 진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된 문익환 목사.

“떠남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 괴로운 척, 괴로워하는 척하지 말 것. 소주 몇 잔에 취한 척도 말고 사랑하는 척. 그래 이게 가장 위대한 기만이지. 사랑하는 척. 죽을 수 있는 척. 왜 죽을 수 없을까? 왜 죽지 않을까? 자살하지 못하는 건, 자살할 이유가 뚜렷한데 않는 건 비겁하지만 자살은 뭔가 파렴치하다. 함께 괴로워하다가 함께 절망하다가 혼자 빠져버리다니. 혼자 자살로 도피해버리다니.”


본인에게 던지는 불평 같기도 하고 김세진과 이재호와 이동수에게 던지는 비명 같기도 하지. 자살할 이유가 뚜렷한데 하지 않는 건 비겁하다고 규정하면서도 외려 그 죽음을 원망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당신은 죽어서 속 편하지 않으냐고, 당신은 이제 이 고통과 절망에서는 차라리 벗어나지 않았냐고 토로하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유서는 그 후 단호해져.

“반성하지 않는 삶. 반성하기 두려운 삶. 반성은 무섭다. 그래서 뻔뻔스럽다. 낯짝 두꺼워지는…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할 자신 없는 자. (중략) 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같은 학번이었던 이동수의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으면서 법전을 파고들고 토플 단어를 외우는 뻔뻔함을 가지지 못했고, 그 죽음에 아파하면서 몸 바쳐 살 용기는 한술 부족했던 청년,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속절없이 앗아가던 역사에 슬쩍 다리만 걸칠 깜냥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비겁함을 ‘함께 빼앗는 죄’로 규정했던 젊은 여학생의 발길은 결국 한강 다리로 향하고 말았어.

1986년 봄의 뼈아픈 죽음들 앞에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문익환 목사였어. 이동수가 떨어져 죽던 바로 그날, 아들이 서울대 강연을 간다는 말을 들은 문 목사의 모친 김신묵 여사는 이렇게 애타게 호소했다고 해. “일제 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그렇게 죽는 거 봤니. 네가 가서 꼭 부탁하거라. 제발 죽지 말고 싸우라고.” 그러나 그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일은 벌어져 이동수가 죽고 박혜정이 스러졌다. 이후 문 목사는 스스로 체포되다시피 감옥으로 갔고, 1년 뒤 6월항쟁을 거쳐 정권의 항복 선언이 있은 후 7월8일 석방됐어.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7월9일 이한열의 장례식에 달려가 부르지 못한 이름들을 통곡처럼, 비명처럼 불렀던 거야. 김세진·이재호·이동수·박혜정, 그 험난했던 1986년 서울대생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익환 목사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아빠는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아파오는 가슴을 쥐고 박혜정의 시를 노래로 만든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를 읊조릴 뿐이야 “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 제502호 ‘전두환 아저씨 나는 왜 죽었나요?’의 ‘전두환씨가 고향을 방문해서 모교 체육대회에 가면 그 앞에서 모교 학생들이 큰절을 올린다지요’와 관련해 전씨에게 절을 올린 이들은 대구공고 재학생이 아니라 일부 동문이라는 지적이 있어 이를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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