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연세대 명예특임교수)은 자타 공인 북핵 문제 전문가다. 미국통이기도 하다. 미국 조야의 많은 인사들과 늘 교류한다. 그런 인물이 미국 심장부 워싱턴에서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그것도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민감한 시기였다. 사드 문제, 한·미 동맹 문제 등 그가 쏟아낸 말 중에서도 정책적으로 가장 폭발력 있었던 것은 북핵 실험과 한·미 훈련을 연계하자는 제안이었다. 즉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한다면 미국과 논의를 통해 한·미 합동군사훈련과 미국의 전략무기 배치를 축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합뉴스6월16일(현지 시각) 미국을 방문한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워싱턴 DC 우드로윌슨센터에서 열린 한·미 관계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문 특보는 6월16일 우드로윌슨센터의 한·미 관계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이런 내용의 발언을 했다. 이후 워싱턴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는 마치 청문회를 방불케 했다. 사드 배치 문제, 웜비어 문제로 긴장감이 흐르는 워싱턴 분위기에서 그의 발언이 미칠 파장에 신경이 곤두선 것 같았다. 문 특보는 미국의 전략자산 배치가 천안함 사건 이후 한국 정부 요청에 의해 시작되었고,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매년 관행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이제 오히려 한반도 긴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정일이 18년 통치하는 동안 미사일 18발을 발사했는데 김정은은 5년 동안 미사일을 53번 시험 발사했다. 그만큼 미군 전략무기가 전진 배치되니까 북한이 약한 사인을 보내면 미국이 칠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대응하는 것이다.” 전략자산의 전진배치를 축소해 긴장을 완화하면 북한도 긍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지난 9년간 독자적 외교·안보 정책 없이 대미 의존에만 익숙해진 보수 언론과 야당한테 그의 주장이 생경하고 위험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진 듯하다. 한·미 동맹에 균열을 초래한다는 보수 언론의 비판, “당장 특보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야당의 공세가 이어졌다. 청와대도 “한·미 관계에 도움이 안 된다. 발언을 자제해줄 것을 당부한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문 특보가 고립무원 지경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관찰에 불과하다. 보수 언론과 야당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큰 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서는 유일하게 박지원 국민의당 전 대표만이 의미 있는 평가를 했다. 박 전 대표는 6월21일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하면서 “문 특보 발언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 그리고 미국의 페리 전 국방장관, 어제 한국에서 연설한 하스 미국외교협회 회장 등과 똑같은 내용이다. 문 특보의 미국 발언은 상당히 계산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타결을 예고한 것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한·미 정상회담 타결을 앞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북핵 문제의 새로운 판을 구축하기 위한 ‘고공 플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문 특보의 워싱턴 발언에 이어 후속 ‘플레이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6월21일부터 〈워싱턴포스트〉, CBS, 로이터통신 등과 연쇄 인터뷰를 했다. 문 대통령은 문 특보의 발언 중 부담스러운 지점은 슬쩍 피하면서도 자신의 북핵 구상을 기정사실화했다. 즉 ‘문정인 특보 발언은 학자 개인의 의견일 뿐이며 한·미 훈련 및 전략자산 축소는 자신이 한 말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북핵 문제는 동결과 비핵화라는 2단계 해법으로 풀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한국이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을 공론화한 것이다.

문 대통령도 외신 인터뷰로 ‘동결’ 공식화

문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를 통해 북한 핵의 동결이라는 중간 목표가 북핵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화됐다. 북한 핵을 당장 비핵화하기는 어려우니 먼저 플루토늄과 우라늄 등 핵물질의 추가 생산을 막는 동결부터 진행하자는 제안은 꽤 오랫동안 한국과 미국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의돼왔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이런 제안을 철저히 외면했다. 한·미 당국은 북한이 먼저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6자회담을 비롯한 모든 대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공허한 정책만 되풀이해왔다. 이른바 ‘전략적 인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이 무책임한 기간에 북한은 마음 놓고 핵물질을 생산하고 실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선(先)동결, 후(後)비핵화’라는 2단계 핵정책의 제시는 바로 지난 9년간 유지된 ‘전략적 인내 정책’에 대한 사실상의 폐기 선언이다. 보수 언론과 야당이 문정인 특보를 비판하는 데 골몰하는 사이 문 대통령은 아무런 저항 없이 북핵 해법의 8부 능선을 훌쩍 넘어버린 것이다.

ⓒ청와대 제공6월21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 회장(왼쪽)과 환담을 나누는 모습.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문 대통령이 내세운 북한 핵동결의 전제 조건이다. 문 특보가 제기한 핵·미사일 실험과 한·미 훈련의 상호 중단, 유예 조치와 일맥상통한다. 대통령이 자신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슬쩍 비켜갔지만 ‘동결’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문 특보 제안을 다른 방식으로 끌어안은 셈이다.


문 특보가 워싱턴에 있는 동안 서울에는 미국 측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이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문정인 특보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부시 정부 시절 국무부 정책실장을 맡아 미국의 중장기 전략을 주로 담당했다. 현재는 미국 대외전략 분야의 최고 싱크탱크인 미국외교협회 회장이자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분야 스승과 같은 인물이다. 한 사람은 워싱턴에 가서 판을 흔들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 와서 조용히 미국의 구상을 밝힌 셈이다.

그는 6월21일 한국고등교육재단 특별 강연에서 북한 비핵화와 동결에 대해 극명한 표현을 써가며 의견을 발표했다. 리처드 하스 회장은 먼저 비핵화에 대해서 “북한 비핵화가 우리가 바라는 바이지만 비현실적 목표라고 생각한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 핵 능력을 동결하거나 상한선을 그어놓고 핵사찰 하는 것을 두고 외교적 협상이 가능하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외교적 스승이라는 그가 북한 비핵화는 비현실적 목표이기 때문에 동결에서부터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어투는 지난해 9월 월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이 국내 언론과 했던 인터뷰를 떠올리게 한다. 페리 전 장관은 당시 미국의 핵 전문가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견해를 소개하며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건 이미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핵무기 추가생산 금지, 성능향상 금지, 기술이전 금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협상 목표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핵동결에 기반한 ‘3NO(추가생산·성능향상·기술이전 금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하스 회장은 “북한은 지금까지 협상을 통해 시간을 벌면서 핵능력을 증강시켜왔다”라고 주장한 전형적인 매파 인사였다. 그런 사람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문재인 대통령과 핵동결론을 공유하며 자리를 함께했다. 서로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연합뉴스6월21일(현지 시각)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왼쪽 가운데)과 중국의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오른쪽 가운데) 등 미국과 중국의 고위 당국자들이 외교안보 현안을 논의 중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문정인 특보는 곤란한 처지를 감수하면서까지 왜 워싱턴 한복판에 뛰어들었을까. 그 열쇠는 리처드 하스가 회장으로 있는 미국외교협회, 즉 CFR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해 9월18일 CFR이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특별보고서를 발표했다. 당시 국내 언론에 보고서 작업을 주도한 마이크 멀린 전 합참의장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을 암시했다고 해 화제가 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보고서 내용이 한국에는 와전됐다. 보고서 내용에는 선제공격이니 예방타격이란 말이 직접적으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북핵을 해결하기 위한 6가지 제안을 적시하고, 북한과 협상해서 모든 안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나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CFR 보고서’가 획기적이었던 것은 미국의 진보 보수 전문가들이 모여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공식 확인했다는 점이다. 북한 비핵화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았던 정책의 파탄을 의미한다. 보고서가 대안으로 제시한 6개 안 중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중국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중국에 인센티브라도 제공해 중국의 대북정책을 미국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바꾸도록 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제안했다. 두 번째는 대북정책의 목표를 우선 핵동결에 맞추고 비핵화는 핵동결 이후의 장기 과제로 설정하라는 것이다. 1단계 목표인 핵동결에 도달하기 위한 세밀한 교환조건을 명시했다. 즉 협상 재개를 위해 북한에 요구할 사항으로 △2005년 9·19 공동성명 재확인 △단계별 점진적 행동 조치, 즉 북한의 점진적 태도 변화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실험 중단(모라토리엄)을 제시한다. 그에 대한 대가로 한국과 미국은 △대북 식량 지원 △한·미 군사훈련 규모와 내용을 수정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렇게 해서 유예조치(모라토리엄)가 내려지면 북한이 플루토늄과 우라늄핵 개발을 동결하고 동시에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한다. 비핵화와 함께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일련의 로드맵이 보고서에 담겨 있었다.

문정인과 하스의 교차점 ‘CFR 보고서’

문정인 특보는 지난해 10월 〈프레시안〉과 인터뷰하면서 CFR 보고서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 중심적 접근이나 한국이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문 특보는 또 북한이 2015년 1월9일 제안한 한·미 훈련과 핵·미사일 실험의 동시 중단을 받아들인 것은 획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후에도 북핵 해법의 로드맵으로 CFR 보고서의 향방을 예의주시해온 것 같다.

예상한 대로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 골격 역시 이 보고서를 나침반으로 삼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중국의 대북정책을 변화시켜 미국에 협조하도록 해야 한다는 CFR 보고서 제1조는 방법론적인 변용을 거치기는 했지만 현재 그대로 진행 중이다. 실제로 6월21~22일 워싱턴에서 미·중 외교안보 전략대화가 열려 그동안의 성과를 평가하고 좀 더 연장하기로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리지주 차관 페이스북계춘영 인도 주재 북한 대사(오른쪽)가 기렌 리지주 인도 내무차관과 악수하고 있다.

문제는 다음 단계다. CFR 보고서에 나온 대로 트럼프 정부 역시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그다음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4월26일 상원의원 100명을 백악관에 불러놓고 압박전술(Pressure Campaign)이라는 이름의 새 대북정책을 발표했다. ‘최대의 압박과 최대의 관여(Maximum Pressure and Maximum Engagement)’를 양 축으로 하겠다고 한 것이다. 압박을 극대화한다는 의미는 짐작 가능했지만 관여정책의 내용은 불분명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도 관여정책과 관련한 발언이 오락가락했다. 틸러슨 국무장관은 미·중 정상회담 직후인 지난 4월9일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면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4월27일 그는 동결에 대한 대가는 없고 비핵화를 위한 대화가 되어야 한다며 기존 발언을 뒤집었다. 또 5월3일 국무부 직원 설명회에서 그는 비핵화 결단을 해야 북한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5월18일 그는 홍석현 특사와 대화하면서 북한이 핵실험 미사일 실험 중단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략적 인내가 끝났다고 하면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오락가락 발언을 두고 미국이 북한과 대화에 나설 준비가 덜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불거졌다. 원래의 구도대로라면 이맘때 러시아가 북측과의 대화를 중재하며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미국 내부 사정으로 여의치 않자 중국에 북한 문제를 맡기는 ‘외주 기간’을 연장했다. 문정인 특보의 발언은 바로 그 점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다. CFR 보고서 제2항에 따른 핵동결의 1단계 모라토리엄 단계로 빨리 진입하라는 것이다. 미국이 자신 없다면 한국이 그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결국 한국의 역할을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의 뜻과 일맥상통한다.

때마침 북한도 반응을 보였다. 6월21일 계춘영 인도 주재 북한 대사는 전날 인도 방송 위온(WION)과 인터뷰하면서 “일정한 상황에서 우리는 핵과 미사일 실험 동결 조건을 논의할 뜻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측이 잠정적이든 항구적이든 대규모 군사훈련을 완전히 중단한다면 우리 또한 (핵과 미사일 실험을) 잠정적으로 중단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문정인 특보가 포문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 하스 미국외교협회 회장이 핵동결론으로 화답하고, 다시 북한이 동결의 입구인 실험과 훈련의 동시 유예조치 의사를 밝힌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택이 주목된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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