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시인은 컴퓨터를 쓰지 않는다. 내가 7년간 문학편집자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만난, 아날로그식 집필을 고집하는 저자이다. 오랜 세월 그러했듯 원고지에 시를 써서 손수 묶고, 편집자를 위해 붓펜으로 공들여 쓴 편지를 맨 앞에 덧붙여 출판사에 우편으로 부쳐왔다. 시인의 정성스러움이 낯설지만 따뜻했다.

편집 작업 기간에 나는 시인에게서 일곱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아무리 일상에서 문학작품을 다루는 편집자라도 직장인이 으레 그렇듯 일하면서 어떤 감상에 젖는 일이 잦지 않은 편이다. 유독 천양희 시인의 편지를 받을 때면 종종 마음속 무언가가 건드려지는 일이 많았다. “추운 날씨만큼 세상도 추워지고 있습니다. 젊은 날이 얼마나 혹독한가요?” “나이 든 사람으로 젊은이들에게 점점 할 말을 잃게 됩니다. 내 발자국 뒷사람의 길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천양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시인의 일생은 순조롭지 못했다. 부산의 유복한 집에서 나고 자라 이화여대 재학 당시 시로 등단했고, 애틋한 첫 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뒤 혹독한 생활고와 애정의 좌절을 맛봐야 했던 시인의 삶은 말 그대로 롤러코스터였다. 대표작 중 하나인 〈단추를 채우면서〉에서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다”라고 표현했듯 천양희 시는 자신의 아픔을 온전히 담아왔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고,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생각이 달라졌다〉)라고 말하는 천양희 시인의 이번 시집도 슬픔의 시절을 온몸으로 버텨온 그녀만이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지막 편지에서 시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는 건 참 누추한 일이지요. 앞으로 굴곡 없이 살길 빕니다.” 굴곡 없는 삶이란 걸 단 한 번도 목격해본 적 없는 우리는 알고 있다. 살얼음판 같은 삶을 관통하면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은 누군가들의 길이 있었기에, 다시 우리도 어려움 앞에 용기를 내볼 수 있으리라는 것을.

기자명 최지인 (문학과지성사 편집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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