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후 딱 한 잔만 마실 상대를 물색하던 중에 패션지 에디터로 일하는 이재위씨의 연락을 받았다. ‘술 좀 마셔봤다는 사람들의 숙취 해소법’에 관한 기사를 쓰는데 혹시 나만의 비법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나는 숙취 해소에는 깊고 긴 수면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모범적이고 유약한 부류의 사람이다. 소싯적 지나친 음주 뒤에는 탄산음료파, 오렌지주스파, 우유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먹토파’였다. 재미있는 답을 떠올리는 사이 그가 다른 이들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숙취 해소를 위해 요가를 하거나 슬픈 영화를 보는 이도 있단다. 다소 엉뚱하긴 하나 실제로 간을 이롭게 하는 요가도 있고 체내로 흡수된 알코올의 10%가량 땀이나 소변 등으로 배출된다고 하니 꽤 과학적인 것도 같은 느낌.

맥주의 계절이 도래할 때마다 어김없이 숙취 해소법이 화제에 오른다. 지나치게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기억하는 푸에르토리코와 몽골의 숙취 해소법은 겨드랑이에 레몬즙을 바르는 것과 삭힌 양의 눈알을 토마토 주스에 넣어 마시는 것이다.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설령 사실인들 해볼 리 없다. 일단 내 주변에는 글로 배운 숙취 해소법을 자신만의 비법으로 삼는 사람이 없다. 모두 실전에서 몸으로 부딪쳐 터득한 것으로 자기를 보호한다.

ⓒ시사IN 조남진굵은 멸치 한 줌을 넣어 국물을 낸 후 신 김치를 썰어 넣고 끓인 김칫국은 숙취 해소용으로 그만이다.

젊을 때 술, 담배를 즐기던 조영희씨의 숙취 해소 비법은 김칫국이었다. 말 그대로 엄마는 김칫국부터 마시고 속 차렸다. 맹물에 굵은 멸치를 한 줌 넣어 팔팔 끓인 후에 신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한소끔 끓여 먹는 김칫국은 굳이 숙취 해소용이 아니더라도 얼큰하고 시원하며 감칠맛이 나는 것이었다. 김칫국에 밥을 말아 훌훌 떠먹고 나서 다시 살림을 시작하던 엄마의 몸 상태를 당시에는 당연히 여겼으나 그게 얼마나 큰 결심을 요하는 일이었는지 이제 나는 안다. 


이혼 후에 예식장 매니저로 일하며 자식 둘을 키우고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조미자씨는 명절이면 차례를 지내고 남은 닭고기를 이용해 해장용 닭개장을 기가 막히게 끓여 냈다. 닭 육수에 집간장을 넣고 고춧가루를 풀어 끓이다가 죽죽 찢어놓은 닭고기와 먹다 남은 나물을 싹 쓸어넣은 후에 달걀을 풀어 살짝 익혀 내놓는 사촌 누나의 닭개장은 특별한 재료 없이도 특별한 맛이 났다. 거기에 셋이 먹다가 셋 다 죽어도 모를 맛 아니냐는 사촌 누나의 입담이 곁들여지면 그때부터 해장 밥상은 다시 해장 술상이 되었다.

조영희씨, 조미자씨가 자신의 노동력을 써서 가계를 꾸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때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엄마와 사촌 누나를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음을 되돌아보고 뉘우치곤 한다. 부모의 품을 떠나 자립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일과 살림을 병행하는 자의 결기가 대단한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한날 숙취에 절어서 이불 속에 꼼짝없이 누워 있을 때면, 알아두면 쓸모 있는 숙취 해소법을 하나쯤 갖고 있는 것이 설마, 진짜 어른의 일인지 궁리해보기도 했다. 숙취 해소를 위해 달걀 프라이를 즐겨 먹는 옛 직장 동료는 어쩌다 어른이 되었을까.

술기운에서 깨면 부끄러움은 어디로 가는 걸까

딱히 술자리에서만은 아니나 술자리에서도 입으로 손으로 발로 폭력을 일삼는 이들을 종종 목격했다. 모두 맨정신에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들도 얼큰하고 시원한 걸 먹으며 숙취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술기운에서 깨면 그들의 부끄러움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에게도 한 시절 술만 마시면 나자빠지는 흑역사가 있었으나 이제 그만, 져버렸다. 부끄러움이 남은 술기운을 이겼다.

야근 후 귀가하여 결국 명태식해에 혼술. 거듭 골몰해보았다. 그리고 술 좀 마신다는 어떤 이들에게 부끄러움만 한 거름이 있으랴, 라는 답을 내었다. 조영희씨와 조미자씨의 김칫국과 닭개장은 자랑할 만한 것이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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