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체코 출신의 언론인이자 작가이며 공산주의자였던 율리우스 푸치크가 쓴 책 〈교수대의 비망록〉을 펴들었다. 잉크가 아니라 피로 썼다고 표현해야 옳을 만한 책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라하에서 반나치 투쟁을 벌이다 체포돼 사형당하기까지 1년5개월에 가까운 고난의 여정을 스스로 정밀하게 묘사했다. 나치에게 처형당한 당사자가 남긴 드문 기록이다. 그가 감옥에서 담배 은박지에 새긴 글을 바깥세상으로 빼돌리려고 간수와 동료 죄수, 그리고 이름 모를 숱한 운반책들이 목숨을 걸었다.

그의 책을 다시 펴든 까닭은 새삼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였다. 돌이켜보면 겨우 그까짓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겪어내면서 엄살을 많이 부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희망이니 열정이니 하는 단어를 가슴속에서 지우고 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고통이 좀 덜어지기라도 한다는 듯 냉소와 절망을 입에 달고 살았다.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율에 지레 겁먹고, 다음 대선에는 김무성 찍고 한국을 뜨겠다는 댓글을 보며 폭풍 공감했던 기억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율로(율리우스 푸치크를 그의 친구들이 부르던 애칭)는 1942년 4월24일 동지 6명과 게슈타포 손에 체포되었다. 비밀경찰은 24시간도 채 안 되어 “도저히 내일 아침 해를 보기 힘든” 상태로 그의 몸을 망가뜨렸다. 말처럼 튼튼한 체질이었던 그는 굴라시(묽은 죽)조차 삼키기 힘든 지경에서 6주를 버티다 기적처럼 살아났다. 아마도 세상에 〈교수대의 비망록〉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는 부활의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인생의 무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부활은 흡사 조명 담당이 모든 조명등을 당신 눈앞에 일시에 비추는 것과도 같다. 당신은 시력이 좋다고 믿을지 모른다. 그런데 부활은 흡사 당신의 눈에 망원경을 대고 동시에 현미경을 덧댄 듯한 것이다.” 죽음에서 헤어나는 순간 그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문재인 대통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걸 바라보면서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났다는 걸 깨달았다. 부족하나마 율로와 정서를 공유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덮었던 백태가 조금은 벗겨진 것 같았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진 것 중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살았다.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가 손에 단단히 움켜쥔 것 중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될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 많은 이들이 그저 밥술이나 먹고 살 만큼 글로벌 시장에서 행세하게 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더구나 외환위기를 겪은 뒤에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건 얼마든지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그 때문에 세 번이나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독재를 자행한 박정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율로는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 누구나 탐낼 만한 보물이 따로 있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율로에게 나치의 감옥은 인간이란 동물을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그곳에서는 죽음이 아주 가깝게 다가와 사람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함께 있을 때는 한없이 강했던 동지들이 적에게 둘러싸여 외톨이가 되자 맥없이 반역자로 돌변했다.

죄수를 상대하는 부류는 여럿이었다. 고문하고 학살하는 걸 즐기는 자들도 있었다. 어떤 자는 게슈타포 앞에서는 죄수의 이를 부러뜨리고 안 보이는 데서는 다정한 척 빵을 내밀었다. 자기의 안위 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독일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만 죄수들에게 살갑게 굴었다. 물에 빠졌을 때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있다가 간신히 헤엄쳐 나오면 그때서야 손을 내미는 괴물들이었다. 그에게 은박지를 건넨 간수처럼 게슈타포의 위협 속에서도 초지일관 약자를 돕는 이들도 있었다. 생명을 구할 수 없을 때는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밖의 전사 가운데서도 처지가 바뀌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들이야말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6·10 항쟁과 촛불시위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때로는 비겁한 자들이 세상을 어둡게 만들기도 했으나 결국 용감한 이들이 승리를 거둬왔다는 명백한 증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의에 굴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연대하고 행동했다는 의미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한국이 전 세계에 가르쳐주고 있다고 극찬한 그 민주주의야말로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아닐까. 많은 이들이 기꺼이 목숨을 버린 덕분에 우리가 누리게 된 생명 그 이상이다.

ⓒ한성원 그림

민주주의는 전리품치고는 초라하다. 종종 우리를 슬퍼하거나 노하게 만든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야 마땅한 자들이 인사 청문회에서 칼춤을 춘다. 자기들보다 백배는 깨끗해 보이는 공직자 후보자들의 흠을 잡느라 혈안이 된 모습을 국민의 공공재산인 전파로 중계해야 하는 게 민주주의다. 저들 중에는 어째서 박근혜 정부의 몰락에 책임을 지고 공직을 그만두거나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걸까. 공직에 있어서는 안 될 자들이 낯 두껍게도 남을 심사하는 진풍경을 봐 넘겨야 하는 게 바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다.

권력을 빌려 남을 괴롭히는 걸 즐겨왔던 자, 불의를 도왔던 자, 일신의 안위만 꾀하다가 이제야 악수를 청하는 자들이 모두 아직 건재하다. 이제 와서 공영방송을 사수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MBC 경영진을 향해 실소만 날릴 수밖에 없다는 게 기막히다. 율로의 말대로라면 지금 저들은 자기들끼리도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 테지만 과연 그걸로 응징은 충분한 걸까.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그나마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 도처에 민주주의의 시체가 뒹구는 형편이다. 매년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의 건강을 진단해온 국제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의 올해 발표에 따르면 “21세기형 독재가 등장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표현의 자유, 다원주의, 법치, 인권 등 거의 모든 지표가 악화 일변도이다.

“21세기형 독재가 등장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하고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닮고 싶어 하는 것 같은 21세기형 권위체제는 지난 세기 공산독재나 군사독재와는 사뭇 다르다. 과도한 이데올로기 선전이나 메시아적 구호를 앞세우지 않는다. 거주 이전과 같은 국민의 일상에 간섭하지 않는다. 미디어는 다양하고 심지어 재미도 있다. 정치 변혁만 꾀하지 않는다면 시민사회는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다. 부패와 연고주의가 만연하지만 사기업은 왕성하게 활동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개척한 이 유연한 독재의 길에 터키·바레인·에티오피아·아제르바이잔·베네수엘라·헝가리·에콰도르·우크라이나·아프가니스탄 등이 발을 들여놓았다. 극우가 득세한 유럽의 여러 나라도 반쯤은 발을 걸친 셈이다.

서방세계의 컨설턴트를 고용해 정부와 기업의 방패로 삼는 일을 처음 시작한 곳은 중국인데, 지금은 날로 확산돼가는 추세다. 서방의 유명인들이 알게 모르게 러시아, ‘스탄’자가 들어가는 중앙아시아 국가, 터키 그리고 중동의 거의 모든 독재국가를 대변하면서 짭짤한 수입을 올린다. 이런 사람들이 유엔이나 유럽연합 안보협력기구, 미주국가연합 같은 국제기구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같은 독재자들을 열렬히 옹호한다.

21세기형 권위주의는 과거 독재의 전유물과도 같았던 계엄, 군사재판, 통금, 임의동행, 정치적 구금, 약식기소 같은 야만적인 방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러시아의 NGO 탄압법, 중국의 인터넷 검열을 배우기 바쁘다. 소수의 진보 언론, NGO는 내버려둔다. 정부가 직접 운영하거나 권력자의 측근이 운영하는 기업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외국 기업과 투자자를 독점하며 그 힘으로 국내 기업을 적절히 통제한다. 미디어에 대한 직접 검열이나 통제는 포기하고 정보기관이 뉴스의 메인스트림을 ‘작업’한다. 메이저에 도전할 만한 언론은 싹을 잘라버리고 변방의 독립 언론을 격려한다.

중국을 빼놓고는 모두 외견상으로는 정기적으로 공정한 선거를 치르고 있기도 하다. 1980년대만 해도 선거를 통해 우루과이·아르헨티나·니카라과·필리핀·폴란드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지금은 거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권위주의 체제들이 선거를 통제하는 기술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러시아에서는 정치공학자라 불리는 이들이 선거를 철저하게 관리한다. 그들의 목표는 야당 지도자들을 물리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경쟁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편이 정확하다. 애초에 경쟁을 할 만한 이들은 여러 가지 범죄 혐의를 씌워 일찌감치 낙마시켜버린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유력한 도전자가 되리라고 점쳐지던 알렉세이 나발니가 날조된 범죄 혐의로 내년 대통령 선거 피선거권을 상실한 것이 좋은 예다. 말레이시아의 유력한 야당 지도자 안와르 이브라힘 역시 남색 혐의에 시달린다. 허풍쟁이, 나약한 놈, 위험한 놈, 엘리트주의자, 외국 이익을 대변하는 자라고 관치 언론이나 매수된 언론이 낙인찍고 덤벼들면 견뎌낼 사람은 거의 없다. 용케 살아남는다 해도 현직 독재자의 선거 병풍 노릇밖에 하지 못한다.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세계 125개국 중 70개국의 선거가 엉터리이다. 이런 요식행위도 귀찮아 베네수엘라·니카라과·볼리비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 등은 선거를 통해 아예 지도자의 임기 제한을 없애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은 박근혜 시대에 이 신독재 체제 초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보기관이 주동한 야당 지도자 음해가 심각한 지경이었다. 대통령 임기를 포함한 권력 체제를 개편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신독재 체제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공통 현상인 역사 교과서 왜곡과 문화계 인사 공격도 자행됐다. 그런 곳에서는 진보에 대한 냉소 역시 흑사병처럼 번지는 게 일반적이었다니 소름이 돋는다. 대통령이 비열한 자들에게도 먼저 찾아가 악수해야 하는 게 민주주의냐고 짜증을 내고 싶다가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참고한 활자:〈교수대의 비망록〉(여름언덕), 〈프리덤하우스 보고서〉, 〈워싱턴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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