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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예수’처럼 불화살을 당겼던 노동자

전태일 열사를 ‘한국의 예수’라 불렀던, 띠동갑 노동자 박영진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호소하고 분신한 그처럼“부당해고 철회하라” 외치고 불덩이가 되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6월 26일 월요일 제5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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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목이 터져라 불렀던 스물여섯 명 가운데에는 누구나 익히 알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날 그곳에 모인 이들에게조차 생경한 이름도 끼어 있었어. 문익환 목사는 익히 알려진 학생들뿐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좀 더 원초적인 절규 속에 죽어간 노동자들의 이름을 타오르는 불길로 되살려놓았단다. 오늘은 문익환 목사가 부른 이름 가운데 전태일처럼 뜨겁게 살다 죽어간 박영진이라는 노동자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문익환 목사가 연설 중 처음으로 부른 전태일과 열세 번째로 불러낸 박영진은 여러모로 닮은꼴이었어. 먼저 전태일은 1948년 쥐띠이고 박영진은 1960년 쥐띠로 띠동갑이야. 고향은 대구(전태일)와 충남 부여(박영진)로 다르지만, 형제는 4남매(전태일)과 5남매(박영진)로 엇비슷했고 둘 다 장남이었어. 또 그 부모가 가난을 이기지 못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살았던 것도 같고 네가 <만화 전태일>에서 봤듯 우산 장수부터 구두닦이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던 전태일처럼 박영진도 구두닦이·신문팔이 등 가난의 바닥을 헤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뭐든 다 하면서 컸단다. 공부는 사치였고 중학교 이후는 교문을 들어가본 적이 없었지. 전태일처럼 박영진도 좀체 좌절을 모르는 사람이었어. “모든 것이 사랑에서 싹트고 거둬진다. 우린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진실에서 정직하게 출발하자. 지난 세월을 좋은 경험이라 믿고 더욱더 분투하는 마음 자세를 갖자.” 나이 스무 살에 이런 일기를 쓰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긋지긋한 과거조차 사랑하려는 사람이었으니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아들의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눈물을 삼키고 있다.

아무리 어둡고 괴로워도 역사는 수많은 삶을 빨아들이면서 움직여가게 마련이야. 12년 차이 띠동갑 전태일의 세상과 박영진의 세상은 달라져 있었어. 그 변화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는 다름 아닌 전태일의 존재였다. 전태일이 노동법 공부를 하면서 한자를 몰라 애를 태우며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이라고 소원했다는 얘기를 기억할 거야. 전태일은 끝내 그의 생전에 대학생들과 교분을 가질 수 없었지. 그러나 전태일이 몸을 내던져 세상을 울렸을 때 철벽 저편에서 자신의 삶을 누리던 사람들의 양심이 눈을 떴다. “우리가 전태일을 죽였다”라면서 가슴을 치며 “노동자의 친구가 되겠다”는 이들이 꼬리를 물고 세상의 낮은 곳으로 스며들었던 거야. 그들 덕분에 박영진은 대학생 친구를 사귈 수 있었어.


전태일의 죽음이 뿌린 씨앗은 싹을 틔워 점차 튼튼한 줄기로 커가고 있었고, 전두환의 폭정 속에서도 등불처럼 빛나던 야학들은 줄기에서 뻗어나가는 튼실한 가지들이 되어주었지. 전태일의 희생은 그렇게 박영진에게 그루터기가 돼. 전태일이 그토록 목 놓아 찾던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박영진은 변모해갔다. 밤샘 작업 후 노랗게 변한 하늘을 이고도 줄기차게 찾아든 야학의 초롱불 밑에서 그의 가슴은 뜨거워져갔어.

노동자가 된 대학생 친구들, 그리고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박영진은 근무하던 공장의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데에 성공해. 노동조합법에 나온 대로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노동청에 들이밀었을 때 박영진의 기분은 말할 것 없이 하늘을 날았을 것이고 하늘 위의 전태일은 자신의 띠동갑 후배에게 손뼉을 치며 발을 굴렀겠지. “장하다 영진아.” 하지만 전태일이 당한 그대로 박영진과 그 동지들은 뒤통수를 맞았어. 회사, 노동부, 경찰까지 일치단결해 유령 노조를 만들고 그걸 노동조합이라고 우기며 박영진 등의 노조설립신고서를 반려한 거야.

박영진은 곧 해고돼. 1986년 신흥정밀이라는 회사에 들어간 박영진은 다시 노조 활동을 했지만 경찰과 회사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줄 생각이 전혀 없었어. 줄줄이 해고와 연행이 잇따랐고 마침내 박영진과 그의 동지들은 이 사실을 폭로하고 공장 식당을 점거하는 투쟁을 계획해. 하지만 계획이 새어나갔고 경찰과 회사 측 노동자들이 되레 식당을 장악해버렸지. 그때였어. 박영진이 석유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이틀 전, 박영진은 후배 여성 노동자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명숙에게”로 시작하는 편지에서 그는 ‘한국의 예수’ 전태일을 얘기하고 있었어. “한국의 예수처럼 남을 위할 줄 아는, 남들과 더불어 사는 내가 되고 싶다.” 청계천 거리에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친 전태일처럼 그는 쩌렁쩌렁 외쳤어. “9시간 노동에 초임 3080원을 8시간 노동에 4200원으로 인상하라!” “부당해고 철회하라!”

ⓒ연합뉴스
1986년 3월18일 이소선 여사(오른쪽)가 분신 노동자 박영진의 곁을 지키고 있다.

옥상으로 밀려 올라갔지만 진짜로 죽을 생각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전태일도 원래는 근로기준법 책을 불 지르려고 했던 거였지. 하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이 그를 불길로 몰아넣었던 것이지. 박영진도 그랬어. 박영진은 성명서에 불을 붙인 후 열을 세겠다고 했어. 셋도 아니고 열이었어. 하나 둘 셋도 아니고 열까지 기다린 것은 일종의 기대였을지도 몰라. 그래도 죽겠다는 사람 앞에서는 물러나주지 않을까 하는. 그때 회사 측과 공권력의 대응은 비아냥이었어. “죽어봐라. 너 같은 XX는 죽어야 된다.” 그리고 카운트아웃. 박영진은 그대로 불덩이가 됐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후 상황은 더 끔찍했어. 살아 있는 육신이 펄펄 타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경찰은 불을 끄려던 노동자 4명을 연행하는 데 더 신경을 썼고 바로 택시에 실려 병원으로 간 전태일 때와는 달리 박영진은 목숨이 사위어가는 서러운 몸뚱이로 10분이 넘도록 현장을 떠나지 못한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던 거야.

전신 화상을 입고 헉헉거리는 박영진 앞에 16년 전과 같이 한 어머니가 나타났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울부짖는 이소선 여사 앞에서 두 젊은이가 마지막 힘을 다 내어 유언 같은 절규를 남긴 것도 똑같아. 전태일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다면 박영진은 이렇게 목청을 쥐어짰단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 이 땅에 정의가 넘치고 사랑이 있어야 하고 평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어머니 이미선씨 앞에서 박영진은 위로 같은 유언을 남겼어. “영광입니다. 어머니. 장한 일이에요.”

어쩌면 그는 스무 살 때 일기처럼 그 끔찍한 최후마저, 지옥불 같은 고통마저 ‘사랑’했는지도 몰라. 여자 후배 노동자에게 ‘한국의 예수’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던, 그 ‘한국의 예수’가 작게나마 바꾼 세상의 ‘혜택’을 입었던 박영진은 그의 삶과 죽음이 부를 또 다른 변화의 싹을 사랑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영광’이라는 단어를 자식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할 수 있었던 박영진은 싹이 트고 잎이 나고 열매 맺음을 믿었던 게 아닐까. 동료들이, 노동자들이, 학생들이,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덧없이 놓아두지는 않으리라 확신했던 게 아닐까. 1986년 3월 스물일곱 살 노동자 박영진은 돌아오지 않는 불화살로 어두운 역사를 그렇게 가르고 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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