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을 맞은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은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의 죽음이었다. 그해 1월14일 서울대 3학년 박종철은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다. 이한열은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6월10일)’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6월9일 열린 결의대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스물두 살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 배은심씨의 삶도 달라졌다. 지난 30년간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이끌며 국가폭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어머니’ 노릇을 해왔다. 6월항쟁 30주기를 맞아 서울 창신동에 있는 유가협 사무실에서 배은심씨를 만났다.

ⓒ시사IN 조남진
배은심 여사는 유가협을 이끈 이유에 대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열이를 좋아하고 한열이가 못 이룬 뜻을 이루려고 해서 나도 엄마로서 같은 길을 걸어왔다”라고 말했다.

6월항쟁 30주년이 곧 이한열 열사 30주기인데.

한열이가 떠난 지 30년이 되도록 좋은 것을 보아도 좋은 줄 몰랐다. 물론 좋지 않은 것, 불의는 더욱 선명하게 보이더라.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열이를 좋아하고 한열이가 못 이룬 뜻을 이루려고 해서 나도 엄마로서 같은 길을 걸어왔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기자 네이선 벤이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두 점을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제공했다.

아들이 쓰러지던 상황을 짐작만 했지 그런 사진이 남아 있을 줄 몰랐다. 보고 싶은 마지막 모습이었고(배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최루탄에 맞아 막 쓰러지는 순간을 생생한 컬러 사진으로 보니까 좀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한열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27일간 사경을 헤매다 떠났는데?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매일 있다 보니 휠체어 타고 다니는 환자들을 자주 봤다. 그럴 때마다 “한열이가 의식이 돌아오면 나도 저렇게라도 휠체어 밀고 다니며 살려내야지” 다짐도 하고 빌었다. 그렇게 되길 간절히 소망했지만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박종철 열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1987〉에 이한열 열사도 나온다던데?

배우 강동원이 이한열 역을 맡아 특별출연한다고 광주 집으로 찾아왔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지가 강하더라. 꼭 한번 이한열 역을 맡아 잘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 몸조심하면서 열심히 촬영했으면 좋겠다.

당초 이한열의 장지가 광주 망월동이 아니었다는데?

그때 장례위원들이 장례를 어떻게 치렀으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한열이 아버지가 “연세대 뒷산에 올라가면 4·19 때 돌아가신 분 묘지가 있으니 한열이를 거기 묻어놓고 가자. 교문 밖으로 이한열 운구가 나가면 전두환 독재정권이 또 학생들을 죽일 수도 있다. 이런 희생은 우리 한열 하나로 족하다”라고 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도저히 안 될 말이었다. 한열이가 보고 싶으면 찾아가서 무덤의 떼라도 만져보고 싶은데 만약 연세대 뒷산에 묻으면 아들 무덤의 풀도 흙도 못 만져보겠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내가 우상호 연세대 총학생회장에게 “한열이를 망월동에 보내자. 광주에서 고등학교도 나왔으니 망월동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 이튿날 “광주로 보내달라. 당신들이 안 보내주면 내가 아들 관을 머리에 이고라도 가겠다.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 살지 여기다 놔두고 못 산다”라고 한 내 호소가 신문에 실렸다.

ⓒ우상호국회의원 홈페이지
1987년 이한열 열사 49재 행사에서 당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가운데)이 영정사진을 들고 서 있다.

당시 우상호 의원과 배우 우현씨가 이한열 영정사진을 들고 함께 찍히기도 했다.

그 사진은 장례식이 아니라 연세대학교 안에서 연 49재 행사 때다.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이 한열이 영정을 들고 교문 밖으로 나가다 경찰에 연행됐다. 잡아갈 줄 알면서 독재에 그렇게 항거한 거다. 우현이도 총학생회에서 사회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배우 안내상도 연세대 동문인데 한열이가 그렇게 아프게 떠나니까 분노했던 것이지. 자주는 못 보고 우상호 의원 선거 기간에 사무실에 가서 두 배우를 만났다.

광주 망월동행에 대해 전두환 정권이 압박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쉽게 망월동으로 갈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부모가 아무리 데려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그런 세상이었다. 전두환 정권 자체가 광주에서 사람을 죽여놓고도 버티는데 한열이를 쉽게 망월동으로 보내줬겠나. 그때도 국민들이 망월동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장례식 때 서울시청 앞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주었고, 또 광주까지 가는데 톨게이트마다 구름처럼 많은 사람이 나왔다. 광주 입구인 장성톨게이트부터 한열이 모교인 광주 진흥고등학교까지 광주 시민들이 거의 다 나와주었다. 한열이가 그나마 광주에 묻힐 수 있었던 건 국민 덕이었다.

한열이의 어릴 적 기억은?

아침에 등교할 때 자주 집에 뭘 놓고 갔다. 뒤늦게 필요하다고 전화하면 내가 택시 타고 학교에 갖다 주곤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학생회장을 했다. 어려운 친구 준다며 도시락을 두 개 싸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이런 아들을 보며 나는 마냥 좋았다. 책임감도 강하고 리더십도 좋고, 참 괜찮은 아들이었다.

남은 자녀들은 어떻게 지내나?

한열이랑 같이 자취했던 두 살 위 누나가 교사가 되었다. 누나가 한열이 옷에서 최루탄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해서 그때 한열이가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 누나가 동생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안일하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전교조 교사가 되어 해직됐다가 복직했다. 학교 다니면서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일도 많은 거 같다.

아들을 떠나보낸 뒤 어머님의 인생도 바뀌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세상을 살았다. 거리에서 살아온 세월이었다. 억울하고 분한 엄마가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이 집(유가협 사무실)에 와서 저 많은 사진을 보면서, 한열이의 억울한 이야기를 다시는 안 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유가협 사무실 한편에는 열사들 사진이 걸려 있다).

유가협 회장을 맡기도 했다.

민주정부라면 민주화 과정에서 숨진 이들이나 군대 등에서 의문사한 이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책을 내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유가협 회장일 때 1998년부터 422일간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여 ‘민주화운동 보상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게 했다. 이제 우리들이 할 숙제는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국가유공자, 민주유공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계속 반대를 일삼았는데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유가협을 이끌면서 가장 힘이 되었던 분은?

민주화운동의 대모이신 고 이소선 어머님이다. 내가 힘들 때 어찌 알았는지 이소선 어머니가 찾아와서 위로해주셨다. 돌아가셔서 답답하고 아쉬운 마음뿐이다.

ⓒ연합뉴스
제30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한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맨 왼쪽)가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함께 앉아 있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도 가끔 만나나?

박종철 아버지는 지금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 허리를 다쳐 거동을 잘 못한다. 가서 보면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더라. 촛불 항쟁으로 민주적인 대통령도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6·10항쟁 기념행사에 같이 참석도 못하셨다.

지난겨울 촛불집회에 자주 나갔나?

서울에서 몇 번 나갔다. 예전 같으면 제일 앞에 앉았을 텐데 지금은 다리가 아파서 헤치고 나오기 힘들어 주변에서 지켜봤다. 처음 촛불시위 한다고 할 때는 백남기 농민 사건처럼 물대포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다. 촛불시위 자체가 평화적으로 치러지는 걸 보니 안심이 되었다. 한편으로 또 한열이 생각도 나더라. 최루탄이 없었으면 내 아들 한열이를 그렇게 안 보냈을 텐데. 촛불시위를 보며, 감사하고 여러 가지 희비가 엇갈리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 대통령이 뽑히는 등 촛불 승리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마음이 편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올해 5·18 기념식뿐 아니라 지난해 총선 때도 만난 것으로 아는데?  

문 대통령이 작년에 국회의원도 당 대표도 아닐 때 광주 망월동에 내려왔다. 그때 한열이 묘를 쳐다보며 문 대통령이 “어머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나한테 묻더라. 그래서 내가 “망월동 옛 묘역도 5·18 국립묘지같이 국가유공자로 만들어주시고 이 사람들도 좋은 자리 가게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망월동 옛 묘역에는 이한열 열사처럼 5·18 당시 희생자 외 민주 열사들이 상당수 묻혀 있다). 그런 문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참 감동스러웠다. 여러 사람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그런 연설, 우리는 처음 봤다.

이한열 세대가 우리 사회 중추가 되었는데?

그 시절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잘하고들 있으니까 내가 특별히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다만 학생운동 했을 때의 순수한 그런 마음으로, 그런 초심으로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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