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장에 60대의 미국인이 나타났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일하는 킴 뉴턴 씨였다. 그는 30년 전인 1987년 6월에도 이곳에 서 있었다. 〈뉴욕타임스〉 〈르피가로〉 〈타임〉 등에 사진을 보내는 프리랜서 사진가로서 뜨거웠던 그해 6월의 거리를 속속들이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당시 관련 사진이 6000장이나 된다.

그중 하나가 이한열 열사와 관련한 사진이다. 그는 이한열 열사의 영정과 함께 선 두 학생을 찍었다. 영정을 든 이는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태극기를 쥔 이는 총학생회 사회부장이었던 배우 우현씨다.

킴 뉴턴은 6·10 민주항쟁(6월항쟁) 기념식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이 사진을 선물했다. 아울러 그는 6월항쟁 30년의 소회를 담은 편지를 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다. 여러 언론이 이를 6월항쟁 기념식의 주요 장면으로 보도했다.

ⓒ연합뉴스6·10 민주항쟁 기념식장에서 킴 뉴턴 미국 애리조나 대학 교수(왼쪽)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기념 액자를 건네고 있다.

킴 뉴턴 씨가 한국을 다시 찾은 건 꼭 30년 만이다. 6월항쟁이 있던 그해 군인 출신인 노태우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보고 이듬해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한국을 찾을 일은 없었다. 모교인 애리조나 대학에서 2007년부터 저널리즘을 가르치며 평범한 교육자로 살았다.


‘30년 만의 한국 방문’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온 건 〈MBC 스페셜〉 ‘6월항쟁 30주년’ 다큐멘터리 팀이었다. 다큐 팀은 이방인의 눈을 통해 30년 전 한국 사회와 현재를 관통하는 작품을 만들 생각이었다. 킴 뉴턴 씨는 탄핵 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3월 다시 한국을 방문해 역사의 현장을 취재했다. 예정대로라면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다큐멘터리가 6월10일을 전후해 MBC에서 방영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다큐멘터리의 방영 여부는 불투명하다. 제작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1노조, 김연국 위원장) 등에 따르면 상황은 이렇다. 6월항쟁 다큐 촬영이 한창이던 2월28일 보도본부장 김장겸씨가 MBC 사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바로 이날 회사 측은 6월항쟁 다큐의 제작 중단을 지시한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김만진 PD가 ‘윗선’의 승인을 받지 않고 제작을 진행했다는 이유다. 하지만 1노조 측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지난 1월 담당 부장이 작성한 〈MBC 스페셜〉 방송 순서 표에는 ‘6월항쟁 30주년’의 방송 예정일이 기록됐다고 1노조는 주장한다. 윗선의 제작 승인 없이 방송표 작성이 이뤄질 리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방송 중단 지시가 킴 뉴턴 씨의 방한을 겨우 며칠 앞두고 내려졌다는 점이다. 이미 촬영 일정 조율은 물론 항공권 구매까지 이뤄진 마당이었다. ‘30년 만의 약속’을 깰 수 없었던 담당 PD는 제작을 강행했다. 그리고 대선 이후인 5월19일 김만진 PD는 회사로부터 감봉 1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제작 중단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작비를 임의로 집행했다는 이유였다. 김 PD는 현재 다큐멘터리 팀을 떠나 외주업체 관리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김만진 PD가 징계를 받던 날 MBC에서는 또 다른 기자와 PD 6명에 대한 징계가 내려졌다. 〈시사매거진 2580〉 ‘세월호, 1073일 만의 인양’을 제작한 조의명 기자는 세월호 인양 지연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삭제하라는 윗선의 지시에 저항한 이유로 ‘주의’ 징계를 받았다. 지난해 〈뉴스데스크〉 인터뷰 조작 의혹을 제기한 김희웅 기자는 ‘출근 정지’ 20일, 외부 매체와 인터뷰한 송일준 MBC PD협회장은 감봉 1개월 처분을 받았다. MBC 보도를 비판하는 영상을 만들어 온라인에 올린 전예지·곽동건·이덕영 등 막내 기수 기자들에게는 근신과 출근 정지 징계가 내려졌다. 이들 모두 자사의 보도 태도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징계를 받았다.

6월 들어서도 김장겸 사장의 퇴진을 주장하는 사내 게시판 글은 대거 삭제되었고, 사내에서 김장겸 사장 퇴진 구호를 외치며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한 김민식 PD에게는 6월14일 대기발령 조치를 내렸다. 정치권에서 MBC 경영진 퇴진 주장이 나오자 ‘방송 독립성 위기’라며 뉴스 보도를 통해 강력 반발하고 있다.

김장겸 사장 퇴진 주장 게시판 글은 대거 삭제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제공5월22일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조합원들이 김장겸 사장의 부당 징계를 규탄하고 있다.

최근 MBC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하나 더 불거졌다. 6월11일 〈시사매거진 2580〉은 미국에 있는 김경준씨 인터뷰를 바탕으로 ‘BBK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방송했다. 이 방송은 최근 MBC ‘기류’에 비춰볼 때 다소 의외여서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해당 방송을 제작한 박종욱 기자는 며칠 뒤 사내 게시판에 ‘〈시사매거진 2580〉을 살려주십시오’라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박 기자는 BBK 보도 제작 과정에서 윗선으로부터 적잖은 압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해당 간부들은 “사기꾼의 말을 들어서 뭐 하느냐” “대법원 판결까지 받은 사람인데,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를 뒤흔들겠다는 것이냐” “김경준이 이야기하는 걸 우리가 왜 들어줘야 하냐. 억울하면 직접 해결하라고 해라”며 아이템 교체를 요구했다고 박 기자는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박 기자는 지난달 휴가까지 내고 자비로 미국에 건너가 김경준씨를 인터뷰했다. 물론 방송이 나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논쟁이 계속되던 중 돌연 5월 말 들어 방영 일정이 잡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보도된 방송은 김경준씨 인터뷰 내용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취재 요청을 거부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의 해명이 들어갔다. 박 기자는 해당 간부들을 향해 “2580이란 소중한 프로그램을 위해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시거나 결단을 내려주시기를 요청드린다”라며 글을 맺었다. 6월16일 현재 박 기자가 올린 글에 대해 회사 측은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

미디어 비평 시민단체인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은 6월9~10일 이틀 동안 7개 공중파와 종편의 뉴스 프로그램이 6월항쟁을 어떻게 다뤘는지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방송이 4~5건 관련 보도를 내보내는 동안 MBC는 6월항쟁 기념식 단 한 건만을 방송했다. 민언련은 MBC가 “군부독재를 타파한 민주주의 역사를 외면했다”라고 비판했다. MBC 한 관계자는 “새로운 경영진은 루비콘 강을 건넜고, 이를 지켜보는 구성원들은 안이해지거나 괴로움에 빠져 있다”라며 탄식했다.

6월10일 킴 뉴턴 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한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3월부터 저는 이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수 없게 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알게 됐고, 이 이야기가 대중에게 보이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알고 슬픔에 빠졌습니다. (···) 언젠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 이르게 되는 길에 저의 이야기가 한국 사람들에게 공유되기를 희망합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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