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힘은 인사에서 나온다. 자신이 물색한 인사로 국정운영팀을 꾸린다. 이를 바탕으로 관료를 통제하고 자신의 정책을 실현할 동력을 만든다. 문재인 대통령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안다. 참여정부 5년 중 4년을 노무현 당시 대통령 곁을 지켰다.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맡았다. 그 기간 내내 인사추천회의 소속으로 인사 검증도 담당했다. 인사추천회의 의장까지 지내며 노 전 대통령의 인사를 지근거리에서 살폈다. 참여정부의 인사를 보면 문재인 정부의 인사를 가늠할 수 있는 이유다.

참여정부는 인사와 관련해 많은 자료를 남겼다. 백서뿐만 아니라 박남춘·정찬용 전 인사수석 등 인사 담당자의 저서를 통해 당시를 복기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의 회고를 통해 인사 철학과 고민을 짚어봤다. 참여정부는 인사 업무에서도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 제도화를 꿈꿨다. 2003년 첫걸음을 뗀 노무현의 청와대는 이전에 없던 새 보좌관 자리를 만들었다. 인사 업무만 담당하는 인사보좌관실이었다. 같은 해 12월 인사보좌관실은 인사수석비서관실로 확대 개편됐다. 김대중 정부까지 민정수석실이 인사 담당 업무를 전담하던 구조를 바꾼 것이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중앙인사위원회를 신설해 국가인재 DB를 구축했지만, 여전히 힘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실려 있었다.

ⓒ사람사는 세상 제공2003년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이 정찬용 인사보좌관(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중앙인사위원회에 근무했던 김성렬씨(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인사수석실 선임행정관)가 2013년 박남춘 의원의 저서 〈대통령의 인사〉에 남긴 증언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는 자기네 파워가 약해진다고 생각했는지 중앙인사위 DB에 협조를 요청하는 일이 없었다. 비서실장이 장차관 인사할 때 DB를 통해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뽑아서 올려 보냈더니, 우리 처장이 민정에 불려가고, 경위서를 쓰고 굉장히 질책을 당했다.” 


참여정부는 인사 업무를 한 부서가 전담하지 못하도록 설계했다. 인사수석실 직무역량 평가보고서를 작성해서 복수 인사를 추천하면, 민정수석실에서 검증을 하게 했다. ‘특이 문제 없어 보임’ ‘다소 부담’ ‘부담’ ‘문제 있어 보임’ 4가지 단계로 나눠 검토 결과를 작성한다. 그런 다음 인사추천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정례화해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 모였다. 비서실장을 위원장으로 정책실장, 민정·인사·홍보수석 등으로 구성됐다. 인사수석실의 추천안과 민정수석실의 검증안을 함께 검토해 인사를 했다. 제도적으로 견제가 가능하도록 해 인사에 사사로운 추천이 낄 틈을 주지 않게 했다.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사 업무에서 상호 견제 구실을 맡은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의 지역 안배까지 균형을 맞췄다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2011년 당시 회고다. “(밀실 인사를 탈피하기 위해) 인사를 추천하는 인사수석실을 만들었다. 내가 민정수석을 맡았기에, 인사수석은 호남에서 시민운동하던 분으로, 지역적으로 균형을 잡으면서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식으로 했다(〈참여정부 정책총서 정부운영 편〉).”

시스템화한 인사 업무는 자연스레 ‘존안 자료’ 의존도를 떨어뜨렸다고 참여정부 인사들은 증언한다. 인수위 당시 당선자 비서실장과 인사특보였던 신계륜 전 의원은 “존안 카드(정보기관에서 작성한 인사 관련 자료)를 보면 ‘부인이 이러한 소문이 있다’고 돼 있다. 소문 정도로 인격과 역량을 평가할 수 없지만 선입견이 무섭다 보니, 확인되지 않은 정보도 한번 입력되면 ‘사실’로 굳어져버린다. 이런 자료는 곤란하다고 판단했다(〈대통령의 인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끝나면서 청와대 인사수석실도 사라졌다. 2007년 취임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인사수석실을 없앴다. 이명박 정부의 밑그림을 짠 박재완 인수위 정부혁신·규제개혁 태스크포스 팀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인사 간섭을 하다 보니 부처가 형해화됐다”라며 부정적으로 판단했다. 견제받지 못한 민정수석실 힘은 더욱 강해졌고, 그 절정은 박근혜 청와대의 ‘우병우 민정수석실’이라는 대명사로 드러났다.

사라진 인사수석실은 9년 후,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부활했다. 6월16일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혼인 무효 판결 등 논란을 겪다 사퇴했다. 조대엽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음주운전과 대주주 및 사외이사로 있었던 회사의 임금체불 의혹 등으로 자격 시비가 붙었다. 동시에 참여정부 시절 인사추천회의의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연합뉴스5월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신임 수석비서관들과 오찬을 한 후 청와대 소공원에서 산책하고 있다.

참여정부에서도 인사 검증 실패 사례는 있었다. 이기준 교육부총리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2005년 1월 참여정부는 이 교육부총리를 지명했지만 사흘 만에 자진 사퇴했다. 아들 병역기피, 사외이사 겸직 의혹 등이 터져 나왔다. 검증과 토론이 소홀했다는 자성과 함께 인사추천위원회 전원이 사표를 썼다. 인사 업무의 양 날개인 정찬용 인사수석과 박정규 민정수석이 옷을 벗었다. 후에 정 전 수석은 “동료 수석(인사추천회의 참석자)에게서 후보자의 부정적인 면을 공개하기 어려워 우물쭈물 넘어갔다”라는 사과를 받았다. 그는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을 갖춰놓은들 제대로 된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정찬용의 도전〉)”라고 회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무위원의 인사 청문 범위를 넓히자고 제안했다. 인사 검증 문제를 청와대라는 1차 관문을 비공개로 통과한 다음, 국회에서 2차 관문을 공개로 거치는 과정을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대통령 권한을 제약하는 게 아니냐는 내부의 우려도 나왔지만 노 전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인사의 공정성과 절차의 신중성 등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국가공무원법 개정을 추진했다. ‘시스템주의자’다운 대책 마련이었다.

보수 언론이 ‘코드 인사’ 프레임으로 공격

그럼에도 ‘코드 인사’는 참여정부 5년 내내 따라다닌 말이다. 〈조선일보〉가 참여정부를 공격하면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인 2003년 2월20일 〈조선일보〉는 ‘우리 경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전문성과 안정감보다는 이념과 ‘코드’를 중시하고 있는 듯한 인사정책은 새 정부 경제정책이 ‘현실’과 끊임없이 부대낄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라고 썼다. 이후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코드 인사 프레임이 유통됐다. ‘코드 인사’는 참여정부 인사를 비판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에 대해 정찬용 인사수석은 정면 대응했다. 2004년 12월12일 코드 인사의 부정적 프레임을 반박했다. 이른바 ‘볼트론’이었다. “220V에다 110V 코드를 꽂으면 타버린다는 점에서 코드와 철학은 맞아야 한다. 코드 인사는 문재인 내각이 대부분 공개된 2017년 다시 반복되는 야당과 보수 언론의 공격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 인사가 늦고 부실한 것은 코드와 입맛을 우선시하는 보여주기식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6월7일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문재인 캠프 사람으로 채워진 코드 인사로 대통령의 인사에 빨간불이 켜졌다(6월12일 박지원 국민의당 전 대표).”

문재인 대통령 또한 2011년 나온 〈참여정부 정책총서 정부운영 편-진보와 권력〉에서 ‘코드 인사 프레임’에 적극 반박했다. “(언론에서) ‘코드 인사’ 딱 해버리니 부정 이미지를 준다. 그런데 대통령이 공약을 내세워 국민 지지를 받아 당선돼 국정을 수행하면, 국정철학이나 이념을 공유하는 이들로 진용을 짜 국정에 임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나? 그런 이들을 발탁한다는 의미에서 코드 인사라는 말은 부당하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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