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장차 되고 싶은 것이 없다. 꿈이라든가 희망이란 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열네 살인 지금까지 되는 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지금 어떤 사고로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난 상관없다.’ 소년은 작문의 서두를 이렇게 썼고 예상대로 교사한테 “똑바로 해”라는 꾸중을 들었다. 하지만 잔소리를 들어도 당연하다고, 아무 상관없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이우일 그림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버지는 자신을 기차역에 버렸고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연락을 받았지만 앞뒤 아무 설명 없이 그저 “와라” 한마디뿐이었다. 그 매정한 말에 분노하고 상처받지만 아버지의 연락이기에 망설임 없이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그런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혈육의 살가운 재회가 아니라 상관으로서 내리는 명령뿐이었다. “에바에 타라. 그게 네가 할 일이다.” 다시 만난 아버지, 새로 만난 보호자, 새로 만난 학급 친구들. 원래 바라지도 않았고 자의로 선택된 상황도 아닌지라 소년은 겉돌거나 부딪혀서 움츠러들기만 한다. 다른 이와의 관계 맺음이 서툴러서 그저 피하려고만 하고, 이는 계속해서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소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기보다 상처 입을 것이 두려워 호의를 가지고 내민 손을 외면했다. 그러나 자신을 믿고 끈기 있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스스로 부정하지만 소년은 다른 이들과 어울리고 자신이 존재할 가치를 원했다. 사람들과 충돌하고 부딪히고 때로는 외면하고 도망가기도 했지만 결국 서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고 그걸로 서서히 마음을 터놓게 된다.

좀 더 나은 내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소년에게 이후 닥친 현실은 열네 살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친구가 탄 에반게리온이 사도의 해킹으로 통제 불능 상태가 되자 자의와 상관없이 공격을 가하게 되고, 전우이자 친구로서 마음을 열었던 동료는 결국 사도와 함께 눈앞에서 자폭해버린다. 새로이 동료가 된 다른 소년에게 애정을 느끼고 기댈 곳이 생겼다고 여기지만, 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죽이고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인 채 끝없이 절망한다. 있을 곳이라 생각했던 곳은 파괴되고, 의지할 만한 어른은 사라지고, 호의를 가졌던 동료들은 모두 죽거나 폐인이 된다. 갈 곳도 머물 곳도 모두 잃어버린 소년은 생각했다. ‘모두 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막상 모두 다 죽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소년은 망설인다. 친구는 ‘다 같이 하나가 될 수 있다’라는 말로 회유한다. 소년은 기로에 선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모두가 하나 되어 아무 갈등 없는 세상이 되는데도 어쩐지 소년은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친구와 긴 대화를 나눈다. 대화를 통해 자신이 생각보다 다른 이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갈등하고 부딪혀서 상처받고 또 계속 상처받는다 해도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소년은 깨닫게 된다.

어른도, 동료도, 아버지도 결국 같은 문제로 괴로워한다

결국 이곳에 있을지 말지를 정하는 건 자신이다. 다른 이가 나에게 상처를 준다 한들 그걸로 내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 소년은 오직 혼자만 그런 고민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돌봐주는 어른도, 경쟁하는 동료도, 나를 외면하는 아버지도 같은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으로 지난한 여정을 거쳐 그 사실을 깨닫는다. 소년은 타인과의 교류란 충돌과 상처도 주지만 모두 하나가 되기보다 제각각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소년은 ‘모두 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거두게 된다.

안타깝게도 소년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끊임없이 상처받고 좌절하고 몇 번이고 모두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의로 걸어갈 때도 있고 타의에 의해 한없이 끌려가기도 한다.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걸어가리라. 가늘게 이어질지언정 결코 끊어지지는 않은 채로. “나는 이카리 신지. 에반게리온의 파일럿.”

2001년 6월6일 이카리 신지가 태어났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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